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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한국-일본사
2016-12-11
360년부터 460까지 100년간 왜열도는 백제-고구려-신라의 해외 원정 싸움터였다.

 
천기누설:왜열도에서 100년간의 삼국지
2016-12-11
원시 채집농 상태였던 조몬 원주민들의 왜 열도에
BC 3세기부터 AD 3세기까지 600년 동안 처음에는 왜 열도에는 가야계와 서남해안 마한계가 벼농사와 청동기, 철기를 가지고 많이 들어갔고 비류백제계가 그 다음으로 많이 들어갔다. 4세기부터는 온조백제계가 많이 들어 간다.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동생과 7명의 왕자가 구지봉 천신 신화를 가지고 왜로 건너 가 아마테우스(천조대신)가 된다. 거창의 대가야에서도 포항, 울산을 거쳐 혼슈 이즈모 신사를 지은 스시노오가 된다. 이 시기는 호족들이 왜열도를 분할 지배하였다.

10대 스진천왕까지는 가야계였고 일본서기가 쓰여질 때 기억이 희미하여 창작이 일부 가미되었을 뿐이며 지방호족중심으로 중앙집권적이지는 않았다. 이 당시 왜인이란 임나가라(부산))계와 한반도 남서해안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대마도와 규슈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용어였다. 4세기부터는 부여계 백제인들이 많이 들어간다. 한마디로 일본인들은 가야인과 남서 마한인과 비류백제인과 북부여계 백제인의 합작품이다.

한반도에 처음 들어 온 사람들은 북방 기마 유목민족이 아니다. 토착 구석기인도 있었고 신석기인도 있었다. 그를 이어 두번째로 남 중국과 동남아 계통이 벼농사를 가지고 한반도에 들어 왔다. 세번째로 알타이 기마 유목 민족이 만주를 거쳐 들어와서 인구의 70%를 북방계가 차지 하였다. 나머지 30%는 남방계이다.

유목기마민족의 계보와 이동 경로는 다음과 같다.

유목기마족은 1.동 알타이(바이칼호)에서 바로 흑룡강(아무르, 아리수)강과 송화강으로 직접 내려 오거나 2.서알타이에서 흉노->화북->산동->요서->요동으로 들어 와서 동 알타이에서 온 집단과 합류하며 배달국과 대쥬신(대조선족)이 형성되었고 대쥬신(대조선)이 다음과 같이 분화되어 갔다. 고구려, 백제의 부여족은 1번 동알타이 루트로 한반도로 들어 왔고 진한, 변한의 신라, 가야인은 2번 서알타이 루트로 한반도에 들어 왔다.
1.동 알타이로부터 서북만주로 코리족이 내려 왔고 그 일부가
남하하여 고조선족, 부여족, 선비족의 북위되고 거란이되며 요나라->지금의 내몽고 및 요서족이 되었다.
2. 코리족의 또 다른 일부가 남동진하여 만주 송화강 부여족이 되고 북간도->요동-> 백제->야마토 왜가 된다.
3. 코리족에서 나온 동부여족의 일파(추모)가 남진하여 고구려
맥족 고씨가 되고 발해가 되며 금나라(여진)-청나라가 된다.
4. 중국 진시황때 만리장성 고역에 부역동원된 북서쪽에 흉노족의 일파가 평양마한으로 도망와서 마한왕이 동남쪽을 허락하매 진한으로 금관의 전통을 가지고 들어 갔다. BC 100년경의 한무제에게 고조선이 망하면서 고조선 6부족이 남하하여 영남지역으로 들어갔다. 한무제에게 생포된 흉노왕자 김일제 후손인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가 100년이 지난 기원전후에 3차로 진한에 들어와서 흉노왕손이기 때문에 경주 사로국의 성현왕으로 추대되었다. 북서의 흉노는 북동의 고조선과 사촌지간이었으나 흉노국은 유목만 하였고 고조선은 유목과 농사를 겸하였다는 점이 조금 다르다.
5. 동복(구리 솥)과 말을 타고 이동하는 기마유목전통을 가지고
고조선과 부여를 출발하여 1000년 왕국 청송 이서국을 거쳐 낙동강 서쪽으로 내려 온 대가야와 금관가야 김수로왕이 가야에 자리를 잡고 일부는 왜 규슈로 가서 이즈나기와 이즈나미 부부가 되고 일본의 시조가 된다.
6. 코리족에서 북으로 가서 서몽고족이 되었고 일부는 고구려, 발해족의 일파가 다시 북서진하여 징기스칸의 동몽골족이 된다. 거란에게 발해가 망하면서 발해 왕족의 일부가 살아남아 동몽고로 도망쳐서 정착하는데 그 후예로 징기스칸이 나타난다.

왜열도로 4세기부터 7세기까지 300년 동안 백제계, 고구려계, 신라계의 이주가 있었고 그 중에서 북부여 백제계의 이주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일본이란 용어는 북부여계를 가르키는 말이다. 당시엔 왜란 말은 가야계와 남서해안 마한계와 대마도계를 의미한다.

이와같이 BC 3세기부터 AD 7세기까지 총 1000년 동안 100만명의 이주민이 한반도에서 왜열도를 들어가서 조몬인과 혼혈로 오늘날 1억2천만명의 일본인이 만들어졌다.

BC 200년경 유방의 한나라가 한족을 재통일하여 연나라 장수 위만이 번조선으로 망명한다. 위만은 번조선에서 쿠테타를 일으켜 위만 번조선이 된다. 위만에게 쫓긴 고조선 마지막 기 준왕이 평양으로 피난와서 마한왕을 치고 평양한왕을 자처하며 고조선의 세력이 점차 한반도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다. 한반도의 정세가 급변하자 반도의 끝자락에 위치한 변한과 서남해안 마한의 백성들이 벼농사와 청동기, 철기를 가지고 채집농 상태의 왜열도로 피난 이주를 하기 시작하여 상대적으로 왜소한 체격의 채집농 조몬 원주민을 복속시키며 일본 2500년의 역사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진시황과 유방에 의한 한족 통일이 한반도 끝까지 영향을 미쳐 변한 가야와 남서해안의 마한의 백성들이 왜열도로 피난을 가게 된 것이 일본 역사의 시작이었다.

북만주에 고리국(까오리국)에서 부여가 나왔고 만주 부여국이 한성 백제와 야마토 왜의 뿌리이다. 고구려도 부여국의 방계이어서 부여의 별종으로 불리었으며 부여를 건너 뛰어 고리국을 뿌리로 보고 고구려라 칭하였다. 졸본부여족 극소수 일파인 온조, 비류가 1차 졸본 부여계 남하를 이끌고 기원전후에 반도로 내려와 이미 평양이남의 한산성과 한강에 터를 잡은 고조선 기 준왕의 세력을 더 남쪽으로 쫓아내고 처음에는 대동강 이남의 한산성과 한강유역에 마한내 소국 십제의 도읍을 정한다. 형인 비류는 지금의 인천(미추홀)과 충남지역에 마한내 소국 진씨 성의 비류백제를 세운다. 그로부터 250년이 지나 3세기에 조조의 위나라가 요동의 공손씨를 몰락시키자 공손씨와 공존하였던 요동 부여왕 울 구태가 만주 부여족의 2차 남하를 이끌고 반도 십제를 병합하여 백제 고이왕이 되면서 목지국 마한왕을 치고 실제적인 대국 백제의 시조가 된다. 4세기에 모용씨의 전연에게 만주 부여왕이 죽고 수도가 점령되자 근초고왕 계열의 부여족이 3차 남하를 하여 반도 부여인 백제에 합류하며 백제가 갑자기 더 커져 강대국 백제가 만들어 지고 가야를 정복하며 왜열도에 진출하여 부여계인 야마토 왜를 연다.

고구려도 모용씨 전연의 침입을 받아 압록강 국내성을 잃고 고국원왕이 평양으로 피신하면서 백제를 침범하였다. 이에 백제 근초고왕은 반격하여 모용씨 전연에게 이미 약화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킨다. 이때가 백제 전성기로서 정복왕인 근초고왕이 가야와 마한과 제주도(남만)을 정복하고 신라와 고구려를 공격하며 왜를 개척하여 또 다른 열도 부여인 야마토 왜를 세운다. 근초고왕은 요동 부여에서 반도 백제로 3차로 내려 온 세력의 중심 인물로 반도부여인 백제를 중흥시킨 한 시대의 영웅이었고 야마토 왜의 시조격이다.

그로부터 30년 후,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평양을 뺏기기 전에는 백제의 도읍지는 대동강 이남의 한산성이었고 낙랑, 대방도 백제령이어서 백제왕이 중국남조로부터 낙랑태수로 봉해졌었다. 30년이 지나 반도부여인 백제는 고구려 광개토왕, 장수왕에게 황해도 대방, 한강 경기지역으로 밀리다가 열도 부여인 야마토 왜로 대거 건너가고 충청지역까지 밀려갔으며 660년에는 나당연합에게 완전히 망하면서 열도 부여인 야마토 왜로 완전히 합류한다. 고구려의 남진이 백제인으로 하여금 열도부여인 야마토 왜로 이민 가는 계기가 되었고 나당연합에게 망하면서 부여계는 야마토 왜로 최종적으로 합류하였다.

고구려는 부여계인 만주 부여, 반도부여 백제와 부여계 정통성을 두고 천 년간 적대관계였다가 망하는 백제를 도우려는 것은 열도 부여인 야마토 왜뿐이였으나 663년백강전투에서 패함으로서 이마저 실패하고 부여계는 야마토 왜로 후퇴하였다.

신라의 경주 김씨(신 김씨) 시조인 김알지는 흉노 왕자이었던 김일제의 7대손이다. 김일제는 한 무제의 군대에게 생포되었다가 일행중 한 사람의 한 무제 암살기도사건을 고변하여 공을 세우고 한나라 거기장군이 된다. 그후 산동반도에 영지를 하사받고 따르는 흉노일파를 데리고 그곳 금성에 투후국을 세워서 다스린다. 그곳에서 7대, 100년을 내려간 김알지 대에 왕망이 쿠테타를 일으켜 전 한을 무너트리고 신나라를 세우는데 투후국 김씨 일파가 가담하여 신나라 권력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20년만에 후한의 유수에게 왕망의 신나라가 망하자 김알지 일파는 쫓기게 되고 동쪽으로 피난을 간다. 이미 진시황의 고역을 피해 진한으로 들어와 살던 흉노민들과 고조선 유민에게 합류하며 한반도 금성(경주)에 사로국 성현왕(김알지)으로 자리를 잡는다. 내물왕부터 박혁거세의 박씨를 제치고 김씨가 왕을 세습하게 된다.

경주에 들어 온 김알지로부터 또 다시 15대를 내려간 신라 문무왕비에 이런 내력이 기록된다. 7대를 중국화된 흉노 투후국의 문화는 신라에 이식되어 스키타이 금 금속문화와 중국 억양과 비슷한 억양이 지금도 남아 있다. 강릉, 함안 등은 중국에도 있는 중국식 이름이다. 당시 북쪽의 흉노국은 동쪽의 고조선과 사촌관계인 기마민족으로 둘 다 한족과 대립하였고 항우를 잡았던 한 고조 유방도 흉노에게 포위되어 풀려나면서 흉노국 선우에게 평생동안 조공을 바쳤고 그 이후 100년 동안 조공이 이어졌을 만큼 강대한 나라였다.

유방시대로부터 100년이 지나 한 무제 때 이런 관계가 역전되며 14세의 어린 흉노 좌현왕의 왕자 김일제도 이 때 생포되었고 위만 번조선도 이 때 한 무제에게 완전히 망하고 사라졌으나 북만주의 부여국과 고구려는 살아 남아 한나라를 끝까지 괴롭혔다. 한족에게 북으로 흉노와 동으로 고조선,부여, 특히 고구려는 두려운 존재였다.

중국에서 AD 3세기에 후-한나라가 망하고 조조, 유비, 손권의 3국지 시대로 분열되어 혼란한 시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는 급성장하게 되며 특히 고구려는 조조의 위나라, 손권의 오나라와 때로는 연합하고 때로는 다투면서 중국대륙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유비-제갈량의 촉나라보다는 훨씬 큰 나라였고 영웅호걸도 관우, 장비, 조자룡보다 훨씬 많았다. 그로부터 400년간 중국은 5호16국 남북조 시대의
혼란기여서 한반도는 중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성장하였다가 북조의 선비족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고구려와 전쟁에 들어간다. 고수전쟁과 고당 전쟁으로 고구려는 약화되고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신라가 성장하게 된다.

그 이후 조조씨 위, 사마씨의 서진, 5호16국 남북조시대에도 중국이 혼란의 시대였기에 백제 근초고왕-근구수왕 전성기 및 왜열도 개척과 고구려 광개토대왕, 장수대왕의 전성기가 있었다. 지금의 북경지역을 다스렸던 고구려 유주자사의 고분이 북한지역에서 발견되어 국사교과서에 그 벽화가 소개된 바와 같이 북경도 한 때 고구려나 요서백제가 다스렸다.

광개토대왕에게 한 때 유린 당하였던 선비족(비려)이 7세기에 강대해져서 남북조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하며 수나라를 세워서 고구려와 대립하며 고구려의 전성기가 쇠퇴하기 시작하다가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의 나당연합에게 백제가 먼저 무너지고 고구려도 무너졌다. 중국이 통일되면 만주, 한반도는 항상 위험하였다.

백제를 먼저 치고 위, 아래 협공으로 고구려를 치자는 전략은 김춘추가 수나라의 고구려공략실패로 고민하던 당나라에게 제안한 전술이었다. 그 댓가를 받아 내어 대동강 이남은 통일신라가 되었다. 부여계 백제는 야마토 왜로 갔고 고구려계는 망한 후 30년이 지나 대동강 이북의 발해로 이어졌다. 이 후 300년간 이 동북아 3국체제 유지되다가 고려는 거란에게 망한 발해의 고구려세력을 흡수하며 압록강까지는 통일하였으나 압록강 건너 요동은 중국세력에게 편입되었다.

송화강 유역 북만주의 부여는 선비족과 고구려의 공격으로 약화되기는 하였으나 4세기초까지는 지속하다가 천 년의 숙적인 고구려와 선비족의 협공으로 송화강 본거지로부터 간도와 요동으로 피난 이주를 하며 간신히 버티어왔다. 이 시기에 만주에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한반도 중부(황해도, 경기도) 지역으로 대거 이주하며(부여족 3차 남하) 반도 부여인 백제가 갑자기 커져 정복왕 근초고왕이 나타나며 전라도 마한소국과 가야를 정복하고 신라를 공격하며 평양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켰고 왜열도까지 영역을 넓힌다. 부여족의 특징은 다무로(담로)를 여러군데 개척하는 것으로 한 쪽이 망하면 다른 쪽의 다무로로 이주해가는 행태를 반복하면서 명맥을 끝까지 유지하였다. 백제는 22개의 다무로를 다스렸다. 임나가라(지금의 부산지역)도 백제 다무로 중 하나이었다. 이곳을 통하여 백제는 왜 열도로 들어 가게 된다.

근초고왕의 반도부여는 가야와 전남 해안의 마한을 정복하기 50년 전에 이미 동해 루트를 통하여 왜열도로 가서 또 다른 부여 분국인 백제 담로국 세운다. 근초고왕은 왜에서 중애천왕을 하면서 야마토 왜 공주와의 사이에 320년에 그의 왜국 아들인 근수구왕자를 낳는다. 반도 부여 백제 근초고왕은 강한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하여 이미 320년에 야마토 공주와 혼인연합하여 또 다른 부여 분국인 야마토 왜를 세운 것이고 그의 왜국 아들인 근구수왕자를 선봉으로 하여 371년에 평양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킨다. 똑 같은 부여국인 백제와 왜가 연합하여 강력한 고구려에 대항하고자 하였고 백제나 왜 야마토는 사라진 만주 부여의 분국이었던 셈으로 일종의 연합국가였고 고구려를 공통의 숙적으로 보아 공동 대응하였다.

근초고왕 초기에는 백제는 함흥을 출발하여 동해안 루트를 따라 임나가라(부산)을 거쳐 왜열도 혼슈와 규슈로 가고 오고 했으나 전남해안 마한과 가야를 정벌한 근초고왕 중기부터는 보다 안전한 서해와 남해를 통하여 반도 부여계가 대거 왜열도에 들어간다. 4세기 초, 근초고왕 초기에 왜열도까지 밀고 들어 가서 왜열도의 기존의 호족들을 제압 및 연합하며 왜열도까지 영역을 늘리고 야마토 공주와의 사이에 아들 근구수왕자를 낳아 그에게 왜를 다스리게 하였다. 이와같이 야마토 왜의 시조는 부여계 근초고왕이다.

362년 규슈의 응신천왕(오진천왕)이 된 근구수왕자는 본주(혼슈)오사카의 가야계 성무천왕까지 병합하며 실질적으로 왜 열도를 최초 통일한 열도 부여계 야마토 왜 대화 정권의 창시자이다. 일본열도에 3개의 부여 다무로(담로국)를 세워서 다스렸다. 오사카 대화 지역과 동경지역과 규슈지역에 각각 백제 다무로를 세워서 다스렸다.

왜에서 응신천왕을 하다가 왜는 아들 인덕천왕(닌도쿠천왕)에게 맡기고 후비인 신공황후를 데리고 부친의 나라 백제로 귀국한 근구수왕자는 371년 평양까지 올라가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킨다. 한 때 중국의 요서지방과 북경(유주지역)에 진출하여 요서 백제군과 진평 백제군을 두어 다스리고 산둥반도까지 지배한다. 왜열도에서는 그의 아들들이 왜왕으로 다스린다. 이때가 백제의 전성기이다.

백제 근초고왕과 근구수왕대에는 만주 부여는 거의 소멸되고 반도 부여(쥬신) 백제가 부여계를 대표하여 평양 등의 한반도 대부분을 차지하고 열도 부여 왜를 개척하였으며 한 때 중국 요서와 북경(유주)과 산동반도까지를 다스리는 당시 동북아 최강국이었다.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까지 한 근구수왕은 백제왕 제위 10년만인 383년에 그의 일본 부인 신공황후가 있는 왜로 또다시 들어 가서 호무다 천왕이 되고 그의 왜국 아들인 왜왕 기(침류왕)을 백제로 보내 침류왕이 되게 한다. 백제로 나온 침류왕은 1년만에 동생 진사왕에게 쿠테타를 당한다. 고구려 침입에 등한시한 진사왕도 오진천왕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하고 아신왕이 이어 받았으나 광개토왕에게 한성을 점령당하고 고구려를 섬길 것을 약속하며 아신왕의 한성백제는 간신히 살아 남았다.

393년 당시 왜에 있던 근구수 호무다 천왕은 무사를 보내 사냥만 하는 작은 아들 진사왕을 죽이고 침류왕의 아들이고 자신의 손자인 아신왕을 백제왕에 즉위시킨다. 아들인 진사왕을 죽이고 손자인 아신왕을 백제왕에 즉위시킬 수 있는 부여계 어른은 당시 왜에 있던 근구수 호무다 천왕뿐이다. 394년 근구수 호무다 천왕은 죽어서 일본 최대의 고분인 460미터의 오진천왕능에 뭍힌다. 이어서 인덕천왕(닌도쿠)이 다스린다. 백제 아신왕은 아직기에게 말 2필을, 왕인박사에게 유교경전과 한문을 가지고 닌도쿠 천왕의 야마토 왜로 가게 한다. 그러나 아신왕도 광개토왕을 막지 못하고 유린당한다.

이와같이 백제로 나온 침류왕은 1년도 안 되어 동생 진사왕에게 쿠테타를 당한다. 진사왕때부터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하여 391년에 즉위한 고구려 광개토왕이 백제 진사왕, 아신왕, 전지왕, 구이신왕을 압박하면서 대동강평양과 황해도를 차지하며 동북아 최강국을 이어 받았고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으며 왜열도까지 진출하였다.

413년에 즉위한 장수왕으로 이어지며 475년에 개로왕의 한성백제를 무너트리며 부여계를 더욱 더 왜열도로 이주하게 만든다. 부여계와 고구려는 이와 같이 서로간에 왕을 죽이고 죽는 천 년 간 숙적이었고 두 앙숙 사이에서 신라는 어부지리를 얻으면서 성장하게 된다. 고구려가 강할 때인 광개토왕-장수왕 때에는 고구려의 보호를 받으며 신라는 성장하였고 당나라가 강할 때는 당나라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한다. 반면에 백제는 광개토왕-장수왕의 고구려에 대항하였고 당나라에 반항하였기에 망하게 되며 왜열도로 피난을 가게 된다.

백제의 근초고왕 중기에 해당하는 355년 왜열도 오사카에서는 근초고왕(왜국이름=중애천왕)이 가야계 성무천왕에게 반란을 당한다. 중애천왕은 규슈백제로 쫓겨갔다. 가야계 성무천왕은 그 후비인 신공황후와 함께 규슈 백제군까지 공격해왔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고 신공황후는 오히려 규슈 백제군에게 생포되었다.

362년 규슈 백제군에 있던 근구수왕자는 다시 오사카까지 쳐들어가서 가야계 성무천왕의 반란을 제압하고 응신천왕에 등극하며 실질적으로 최초로 왜열도를 통일하며 야마토 왜 대화정권을 키운다. 근구수 응신천왕은 규슈에서 생포했던 신공황후를 후비로 맞이한다.

367년 근구수왕자는 야마토 왜에서 응신(오진)천왕으로 5년간 재위하다가 신공황후를 데리고 동해안 루트를 따라 백제로 나오며 왜는 아들 인덕천왕에게 맡긴다. 이 때 동해안 루트를 타고 백제로 돌아가던 근구수왕자와 신공황후는 신라군과 전투가 있었다. 일본서기는 이 전투에 대하여 아전인수격으로 신공황후의 무공을 과장하여 기록하였다.

369년 백제 근초고왕은 목라근자라는 장수와 함께 전라도 마한 소국과 가야 7국을 복속시키며 목라근자가 가야를 다스리게 한다. 이 때부터는 백제는 더 안전한 서해-남해안 루트를 타고 왜열도로 간다. 백제-가야-야마토 왜를 연결하는 부여계 축을 만든다.

371년 근구수왕자는 평양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킨다. 이 때가 백제의 전성기이다.

백제에 나온 근구수왕자와 신공황후 사이에 침류왕자를 잉태한다. 왜의 땅에서 태어나게 하여 장차 그곳의 왜왕을 시키기 위하여 임신한 상태로 신공황후는 먼저 왜로 돌아가고 규슈 후쿠오까에서 침류왕자를 출산한다. 근초고왕은 전남 서남 해안의 마한과 가야를 정벌하면서 왜로 되돌아간 며느리 신공황후와 왜왕 기(침류)의 왜 군사 협조를 받았고
그 기념으로 칠지도를 보내며 손자인 침류왕자(왜왕 기)에게 왜왕권의 상징으로 삼게 하였다. 즉, 할아버지 근초고왕은 왜 왕권의 상징으로 칠지도를 며느리 신공황후와 백제 담로국왕에게 보내 이를 기리고 침류왕자 탄생을 축하하며 그를 왜왕 기가 되게 하여 왜를 다스리게 한다. 8세기에 만들어진 일본서기에 신공황후가 가야, 신라, 고구려, 백제, 마한을 정복하였다는 기록은 시부모인 근초고왕의 정벌활동을 차용하여 각색하였거나 근초고왕을 가공의 신공황후로
둔갑시킨 것이다. 오진천왕이 신공황후의 아들이라면 신공왕후는 근초고왕 자신이거나 근초고왕의 왕비이어야 맞다. 그러나 신공황후는 근구수왕의 후비이다. 396년 고구려 광개토왕의 백제 정벌 때에 공주 웅진 백제후왕이 피난길에 올라 하동을 거쳐 왜열도로 이민을 가
서 니기하야이(선 이주한 비류백제계 모노노베씨족의 우두머리)의 야마토 왜를 복속시키고 야마토 왜왕을 차지하는데
2년전에 이미 죽은 근구수 호무다 천왕(오진천왕)의 이름을 차용하여 계속 사용한다.

374년 백제에서 근초고왕이 서거하자 고구려를 물리친 공이 많은 근구수대왕이 등극한다. 근구수왕 치세 10년 동안은 고구려가 백제영토를 빼앗지 못하였다.

383까지 10년간 재위하던 백제의 근구수대왕이 다시 일본 부인 신공황후가 있는 왜로 들어와 호무다 천왕이 되고 왜왕 기(침류왕자)를 백제로 보내 침류대왕이 된다. 호무다란 말은 백제땅이던 한산성
또는 고마루(웅진=공주)를 가르키는 말이다. 근구수왕자는 왜에서 천왕을 이름을 바꿔가며 2번 하였다(응신천왕 5년, 호무다 천왕 10년). 호무다 천왕으로 10년을 재위하면서 그의 후손들인 백제왕이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유린되기 시작하는 것을 멀리서라도 막아 보려고 애썻으나 실효를 보지 못하고 394년 마침내 죽어서 일본땅에 최대의 460미터가 넘는 호무다 고분에 뭍힌다.

왜에 다시 와서 10년을 재위하고 394년에 근구수 호무다 천왕은 죽어서 오사카에 일본 최대고분에 뭍힌다. 그를 이어 그의 아들 인덕천왕, 이중천왕(왜왕 찬)이 고구려계 고진왕자에게 규슈를 뺏기고 백제계는 왜열도의 혼슈만를 다스린다.

백제왕이던 사람이 어찌하여 죽어서 왜 열도에 뭍혔을까? 당시 왜 열도가 백제의 영역인 다무로이기 때문이었다. 백제 아신왕에 이어 405년에 즉위한 전지왕도 구이신왕, 비유왕에게 왕을 넘기고 왜로 가서 불교승을 하다가 고구려계 고진(윤공 천왕)에게 죽임을 당하여 왜에 전지능으로 뭍혔다.

396년 신라 눌지왕은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신라왕자(후에 실지왕)를 인질로 보내고 속국으로 자세를 낮추면서 생존하였다. 아신왕의 백제는 속국을 거부하고 대항하므로 광개토왕은 백제를 공격하여 쑥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웅진(공주)의 백제후왕과 하동의 백제후왕은 왜로 겨우 도망 망명을 가게 된다. 왜로 도망 망명 온 웅진 비류백제후왕은 397년에 오사카 갯가를 간척하며 그곳에 정착하였는데 그곳의 후왕을 전복시킨다. 고구려계 고진(윤공천왕)에게 인덕, 이중천왕이 당하고 반정천왕(왜왕 진)이 혼슈의 북쪽으로 백제계를 이주시킨다. 오진천왕은 110년을 사는 것으로 일본서기에 기술되는데 근구수 웅신천왕부터 곤지 유라쿠 천왕까지의 100년의 기록을 차용하였다. 따라서 오진천왕의 기록에 해당하는 왜왕은 여럿이다. 그 중 또 한 명이 피난 망명해 온 웅진백제후왕 출신인 오진일 수는 있다. 오진천왕 고분에 뭍힌 사람은 백제 진사왕을 폐하고 아신왕을 앉힌 부여계 큰 어른이므로 근구수 호무다 천왕이 맞다.(단, 근구수 호무다 천왕의 아들인 인덕 즉 닌도쿠 천왕의 묘라는 설도 있다)

광개토왕에게 함락당한 한성의 백제 아신왕은 고구려 속국이 되기로 맹세하고 겨우 살아 남았다. 이 때 많은 백제 피난민이 살기 위하여 임나가라(부산)를 거쳐 대거 왜로 갔으며 임나가라인 부산지역에 밀집하여 신라를 위협하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130년 동안 임나가라는 백제땅이거나 신라땅이거나를 반복하다가 532년 때, 김유신의 조부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었는데 신라에게 합병되며 신라인이 되었다. 562년에 고령 대가야도 신라에 합병되어 신라가 커진다.

광개토왕에게 쫓기어 왜로 가기 위하여 임나가라(부산)에 밀집한 백제피난민들에게 국경위협을 느낀 신라는 고구려에 원군을 청하였고 고구려 5만의 보기병이 내려와 임나가라의 종발산(부산)까지 점령하고 대마도와 규슈에 고구려계가 밀고 들어 온다. 이때 만주국경에서 북위가 쳐들어 오자 내려왔던 5만의 고구려 보기병은 급히 북쪽으로 돌아가고 이 틈을 타서 백제유민들과 왜의 백제 담로국이 임나가라(부산)을 다시 점령하고 신라로 쳐들어와 신라를 위협하였다. 돌아 간 고구려군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 위태로운 신라는 왜에 왕자를 인질로 보내고 협상하여 왜군사와 백제피난민이 물러간다.

백제는 임나가라(부산) 지역에 밀집한 백제피난민들의 일부를 다시 데려다가 김제평야에 벽골제라는 저수지를 만들게 하고 농사를 시켜 정착하게 한다. 16년이 지난 418년 신라의 박제상은 대마도로 건너 가서 대마도 백제 담로왜왕을 속이고 인질로 잡힌 신라왕자를 구해온다. 속아서 화가 난 왜왕 진은 박제상 뒤를 따라 임나가라(부산)에 상륙하여 신라를 밀어 올린다. 임나가라(부산)은 다시 백제계가 차지한다. 그 당시 임나가라(부산)지역은 고구려-신라 연합군 대 백제-왜의 연합군의 일진일퇴의 싸움터였다.

320년부터 460까지 140년간 왜열도는 백제-고구려-신라의 해외 원정 싸움터였다. 특히 백제-고구려간의 싸움은 치열하였고 왜열도에서의 최후의 승자는 455년 왜왕 재(사이)개로왕자와 곤지왕자의 백제계였다. 처음 80년은 백제가 왜열도를 지배하였고 400년부터 50년간은 백제계와 고구려계가 왜열도를 나누어 지배하였으며 460년부터는 백제계 곤지왕(유라쿠 천왕=왜왕 흥 또는 왜왕무)가 다시 왜 전체를 지배하고 오늘날 천왕은 그의 후손이다.

369년대 백제전성기 근초고왕의 왜국 아들 근구수왕자는 왜에서 가야계 성무천왕의 반란을 제압하며 응신천왕을 하다가 백제로 귀국하여 371년 평양에서 광개토왕의 할아버지인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킨다. 374년 부친이 죽자 근구수대왕이 되어 383년까지 10년간 백제를 다스리다가 일본부인 신공황후가 있는 왜로 다시 건너가 호무다천왕이 되어 왜를 10년간 다시 다스리고 왜왕 기(침류왕자)를 백제로 보내 침류대왕이 되게 한다. 백제로 나온 침류대왕은 재위중에 동생 진사왕에게 쿠테타를 당하고 침류세력중 일부가 당시 백제령이던 산동반도로 간다.

혼란한 백제 진사왕을 고구려 광개토왕이 밀어 붙이고 이 때부터 백제는 세력과 영토가 쪼그라 든다. 광개토왕은 백제왕, 신라왕를 신하국으로 삼는 대신 살려주었으나 장수왕은 남진정책으로 펼치며 고구려에 저항한 한성 백제 개로왕을 참수하고 신라는 속국으로 삼고 가야, 왜도 압박하며 밀어 붙인다. 더 많은 백제인뿐만 아니라 많은 신라인들도 대거 왜로 피난을 가게 된다. 이 때 신라인들도 특히 많이 왜로 들어 가서 고구려계 고진왕자와 신라계 김무왕자 휘하의 각지에 신라 마을을 이루고 산다.

왜를 떠난 왜왕 기(침류왕자)는 백제에 돌아 와 침류대왕을 하다가 동생인 진사왕의 쿠테타에 당시 백제땅이던 중국의 산동반도로 들어 갔는데 한 때 선비족에게 완전히 몰락하여 거지로 전전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동진의 장수가 되어 이름을 유유장군으로 개명하고 송나라를 개국하는 송나라 고조가 된다. 이와같은 인연으로 남조의 송나라는 왜와 밀접한 외교관계를 유지한다.

백제 전성기 근초고왕의 369년부터 30년 후인 391년 즉위한 고구려 광개토왕의 세력이 396년 복속하지 않는 백제를 공격하여 진사왕, 아신왕, 전지왕을 압박하며 한반도 전체에 세력을 미치고 백제계가 다스리던 대마도와 규슈까지 밀고 내려오며 신라를 속국으로 삼는다.

391년 광개토대왕이 즉위하면서 백제는 쪼그라들기 시작한다.
396년대--413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백제, 가야를 정벌하고 백제계가 다스리던 대마도와 규슈(구주)까지 차지하며 왕자 고진을 보내 그곳에 임나 10연정을 세워 다스렸다. 임나 일본부는 광개토왕이 왜의 구주를 다스리게 위하여 대마도에 만든 것이다. 왜에서 삼한이란 대마도를 가르키는 말이다. 이 때 백제계는 규슈를 고구려계 고진 왕자에게 잃고 오사카 야마토 대화를 중심으로 본주(혼슈)만을 다스리게 된다. 이 때는 규슈는 고구려계가 지배하고 혼슈는 백제계가 지배하는 남북 2국 시대였다.

특히 396년 광개토왕의 대대적인 백제정벌 때에 현재 충남지역의 성들(이잔)을 함락하자 진씨 성의 공주(웅진) 비류백제 마지막 제후 오진 일행이 하동을 거쳐 왜로 도망 망명을 간다. 웅진 백제후는 규슈를 거쳐 오사카로 쳐들어 간다. 오사카 기존의 니기하야이(왜왕 지)를 정복하고 또 다른 오진 왜왕이 되어 오사카 갯가를 간척하고 정착하며 웅진 비류 백제계 진씨가 더욱 오사카 갯가로 이주하여 야마토 왜를 더욱 백제계로 강화시킨다. 하동의 백제후도 왜로 도망 망명을 하여 동경 북쪽에 백제 다무로를 세워 정착한다. 이 시기에 왜열도에는 규슈, 오사카 대화, 동경북부에 각각 다무로(담로국)을 두어 총 3개의 다무로를 두어 다스린다. 한성의 아신 백제왕은 광개토 고구려의 속국이 되기를 맹세하고 간신히 살아남는다.

413년 광개토왕이 죽고 장수왕이 즉위한다.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하고 남진하며 475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과 모후와 태자를 참수한다. 3년이 지난 478년 왜왕 무를 하던 무령은 중국 송나라에 상표문을 보내는데 부형의 3년 탈상을 지내고 고구려에 복수를 다짐하는 내용이다. 477년에 곤지는 백제 공주로 나왔기 때문에 곤지(유라쿠 천왕)은 478년 송나라에 상표문을 보낸 왜왕 무가 될 수 없다.

413--430년: 규슈만을 다스리던 고구려계 광개토왕의 아들인 고진이 백제계 인덕천왕의 오사카 대화까지 쳐들어와 인덕천왕을 죽이고 고구려계 윤공천왕이 된다. 패잔한 백제세력은 완전히 망하지는 않고 침류대왕의 아들인 반정천왕(왜왕 진)을 따라 혼슈(본주)의 북쪽 백제 담로국으로 도망가서 혼슈의 북쪽만을 다스린다. 이 시대는 혼슈도 남북으로 갈라져서 다스려지는 혼슈남북 2국 시대이다. 왜 열도에서도 고구려계와 부여계 백제는 패권을 두고 이와같이 치열하게 싸웠다.

430--450년: 오사카 야마토 대화 조정까지 차지한 고구려계 고진 윤공천왕은 신라계 왕자인 김무을 신하로 삼아 구주는 일본부 안라라국 왕을 시켜서 규슈를 신라계가 다스리게 한다. 이 시기는 왜열도는 3국시대가 된다. 즉, 규슈는 신라계, 오사카대화는 고구려계, 동경 등 혼슈 북부는 백제계가 다스린다.

443년 개로왕자는 비유왕자 반정천왕(왜왕 진)에 이어 왜왕 제(사이 천왕)이 되고 혼슈의 동경 등 북부만을 다스리다가 450년에 김무의 규슈를 공격하여 규슈남부를 되찾아서 오사카 대화를 남북으로 포위한다. 그 과정은 450년에 한반도 삼척에서에서 고구려와 신라사이에 국경분쟁이 발생하여 틈이 벌어진 것이 백제계 개로와 곤지에게 기회를 준것이다.
즉, 왜왕 제인 개로왕자는 450년에 구주의 신라계 김무를 공격하여 구주남부를 되찾아서 혼슈의 북부와 규슈의 남부를 동생 곤지에게 맡기고 455년 백제로 나와 개로대왕이 된다.

453년 오사카 대화 조정의 고구려계 윤공천왕이 아들 목리경태자에게 독살당한다. 신라는 조문사절로 위장하여 80척의 배에 군사를 태워고 구주북부의 신라왕자 김무와 합쳐서 오사카 대화 조정에 문상을 간다. 문상중에 목리경태자를 죽이고 김무가 신라계 안강천왕이 된다.(이 배반으로 왜 열도에서 고구려-신라 연합이 깨진다) 이 때까지 가야를 포함한 한반도 4국의 왕자들이 돌아가면서 왜왕(천왕)을 하였다.

3년이 지난 456년 조문 온 배 8척의 신라군사가 신라로 되돌아가게 되고 그 약한 틈을 타서 고구려계 고진의 또 다른 아들인 웅략천왕이 3년만에 신라계 김무 안강천왕을 몰아내고 오사카 대화에 고구려계 정권을 회복시키고 4년동안 오사카 대화를 다스린다.

460년 본주의 북부와 구주의 남부를 다스리던 개로의 동생인 곤지(유라쿠 천왕, 왜왕 흥)은 구주북부의 신라계를 제압하며 구주를 완전히 되찾는다. 그리고 남북방향에서 고립된 오사카 대화로 쳐들어가 고구려계 웅락천왕을 죽이고 왜열도를 다시 부여계 백제가 재 통일하여 새로운 백제계 통일 정권을 세운다. 그 이후 그의 자손들이 천왕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렀다.

460년 왜열도를 백제계로 재통일한 곤지(왜왕 흥)는 461년 형인 개로대왕을 만나기 위하여 백제 한성으로 나왔다가 465년 무령왕자를 임신한 개로대왕의 후비를 데리고 다시 왜열도로 가서 477년까지 유라쿠 천왕이 된다. 이 때의 무공으로 일본에서 현인신으로 추앙받는 자는 개로와 곤지이다. 이 때부터는 백제계가 천왕을 지속하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465년 배를 타고 왜로 가던 곤지와 임신한 개로왕 후비는 각라섬에서 무령왕자를 낳는다. 그래서 이름을 사바로 짓는다.

왜열도에서 자란 무령왕자는 백제 공주로 다시 나간 곤지에 이어 477년부터 왜왕 무로 즉위하다가 고구려에게 죽은 부형(개로왕과 태자)의 원수를 갚고 자 하는 내용의 상표문을 478년에 송나라에 보낸다. 25년동안 야마토 왜를 다스리다가 502년 백제로 귀국하여 무령대왕이 되었고 523년에 죽어서 공주의 무령왕릉에 뭍혔으며 1972년에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1500년만에 세상에 나타났다. 이 당시 백제왕은 대왕이라 칭하였고 왜왕은 한 단계 아래인 왜왕(후왕)으로 칭하였던 바와 같이 백제가 한 단계 위인 큰 집 역할을 하였다.

478년 왜에서 왜왕 무를 하던 무령은 중국 송나라에 상표문을 보낸다. 그 내용은 475년 한성에서 장수왕에게 죽은 부친인 개로대왕(사이)과 형인 태자의 3년상을 마치고 고구려에 복수를 다짐하는 것이었다. 478년에는 곤지는 공주로 나왔다가 1년전에 이미 죽은 상태였기 때문에 왜왕 무는 곤지가 될 수는 없다.

443년 왜왕 제(사이천왕)이 된 개로왕자는 450년 규슈의 신라 김무세력을 북규슈로 쫓아내면서 455년까지 남규슈와 북혼슈를 다스리는 왜왕을 하다가 백제 한성으로 나와 개로대왕이 된다. 이와같이
왜열도를 백제계로 재통일의 기초를 만든 개로(왜왕 제=사이천왕)는 한성백제로 나와 개로대왕이 되고 왜에 남아 있던 동생 곤지가 고구려계 고진(웅략천왕)을 죽이고 왜열도를 백제계로 재통일하여 왜왕 흥(천령천왕,유라쿠 천왕)되어 477년까지 야마토 왜를 다스린다. 곤지는 당시 왜 열도에서는 영웅이었다. 이때 구주는 무령왕자에게 다스리게 한다.

477년에 당시 부여계 최고 어른인 곤지(유라쿠 천왕)는 혼란한 백제 공주로 나오면서 무령왕자를 왜왕 무가 되게 한다. 공주로 나와 내신좌평을 하던 곤지는 3개월 후에 의문의 변란을 당하여 죽는다. 공주에서 죽었기 때문에 일본에는 곤지의 신사는 있으나 무덤은 없다. 공주의 무령왕릉 주변에 곤지의 무덤이 있었을 것이다. 왜왕 무는 477년부터 502년까지 25년간 왜왕을 하다가 백제 공주로 나와 무령대왕이 된다. 백제로 나온 무령대왕은 임나가라(부산)을 다시 찾고 한강 가까이까지 재탈환하는 등 국력을 회복시키고 백제-가야(임나일본부)-왜를 다시 연결시킨다. 신라는 가야를 뺏앗아 이 부여계의 연결 축을 끊으려 하였고 532년 마침내 백제 성왕으로부터 김유신의 조부가 왕이었던 김해 금관가야와 임나가라(부산)를 완전히 뺏았는다.

무령대왕의 뒤를 이은 백제 성왕은 왜의 킨메이 천왕과 동일인이거나 가까운 혈족관계인데 가야를 통한 연결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560년 신라는 마지막 가야인 대가야마저 빼앗아 백제-왜의 연결을 방해하게 된다. 신라는 북쪽으로는 강력한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하여 당과 연합하였고 남쪽으로는 가야를 빼앗아 백제-왜의 연결축을 끊으려는 전략을 구사하여 결국은 성공하였다.

성왕대에 백제는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유역을 고구려로부터 되찾았으나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다시 빼앗긴다. 이 때부터 백제와 신라는 적대 관계가 된다.
고구려는 중국 남북조시대를 통일한 수나라의 공격과 당나라의 6번의 초기 공격도 잘 방어하였으나 국력이 많이 소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와 부여계인 백제-왜는 연합하여 통일 수나라, 당나라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고구려는 한족의 북쪽을 위협하고 백제와 왜는 한족의 해안을 위협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사대 복종하겠다는 신라와 함께 백제를 먼저 치고 다음에 고구려를 치기로 한다.

660년 부여가 나당에게 함락되었으나 3년간 치열한 전투는 더 계속되었다. 같은 부여계인 왜가 백강전투로 백제의 부흥을 원조하였으나 대패하고 663년 백제가 완전히 망하였다. 이 때 백제인들은 왜로 가면서 언제 다시 웅진의 조상묘(무령왕릉)에 참배하러 올까? 라고 일본서기에 적어 놓았다. 3국중 1국이 무너지면 균형이 깨져서 다음 1국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로 남북으로 고립된 고구려도 나당에게 5년후 망하고 발해로 이어졌다. 660부터 3년간 백제 귀족의 거의 전부를 포함하여 20만명이 왜로 들어가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면서 천왕을 칭하게 된다.

663년 백강전투를 통하여 동북아 판도가 결정되고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중국세력은 자기들에게 사대 복종하는 순치된 나라를 한반도에 두고 싶었고 마침내 그 뜻을 이루었으며 조선말까지 그런 사대 체제는 이어져왔다. 당시부터 동북아에서 중국에게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일본만이 남게 되었고 오늘날로 그러하다. 한일합방으로 일본세력이 다시 한반도에 들어왔다가 미국이 일본을 대신하여 반도의 남쪽 반에 들어 와 중국과 대치하고 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은 휴전선에서 대치하며 평화는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다. 우리끼리 남북으로 대치시켜놓고 그들은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형국이다. 백강전투, 임진왜란, 6.25전쟁 모두 국제전이며 한반도에서 양세력은 항상 충돌하였다.

왜 열도를 백제계로 재통일하는 초석을 놓으며 왜에서는 영웅이었던 개로대왕은 한성(풍납토성 혹은 하남의 춘궁성)에서 475년에 고구려 장수대왕의 기습 침입을 받아 태자와 함께 참수당하고 신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려 갔다가 화를 면한 문주가 목만치 대신의 도움을 받아 공주로 천도하여 문주왕이 된다.

475년부터의 공주 백제 시대부터는 열도 부여인 왜 야마토가 인구도 백제보다 더 많아지고 백제와 대등한 관계가 시작되고 오히려 부여계의 큰 집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455년부터 20년간 왜왕 흥(천령천왕)이 되어 왜를 다스리던 곤지도 477년 불안하고 혼란한 문주왕 치세의 안정을 위하여 공주로 나오면서 왜열도는 왜왕 무(무령왕자)에게 완전히 맡긴다. 웅진(공주)으로 나온 곤지도 1년도 안 되어 혼란한 웅진 정국속에서 죽고 문주왕, 삼근왕도 암살당하매 왜에 있던 왜왕 무(무령)은 곤지왕의 둘째 아들인 다마를 규슈 호위군사 500명을 대동시켜 공주로 보내서 동성왕에 등극시킨다. 이 시기에 가야를 다스리던 백제 대신 목만치(목라근자의 아들)는 왜로 건너 가 소가씨의 시조가 되며 100년 동안 소가씨가 왜 조정의 실권자가 되다가 645년 텐지 왕자일행에게 소가씨 종가가 목을 배여 참살당한다. 663년 텐지왕자는 왜군 2만7천명을 이끌고 백강전투를 지휘하였으나 패하고 왜로 돌아 가서 텐지천왕이 되고 한반도를 적대하기 시작하였다.

25년간 왜왕 무가 되어 왜를 다스리던 무령은 501년 공주로 나와 동성대왕에 이어 무령대왕이 되고 왜열도는 사촌형(곤지의 아들)인 게이타이(계체)천왕에게 맡긴다. 무령대왕은 사촌인 왜의 게이타이 천왕에게 청동거울을 보내며 장수를 기원하고 3년 주기로 오경박사를 보내 유교경전을 왜에 전파시킨다. 무령대왕의 아들인 성왕은 불경을 킨메이 천왕의 왜에 전파시킨다.

그 후 660년까지 160년 동안 공주-부여 백제는 왜와 밀접하게 교류하였다. 663년 백강 전투에 3만의 왜군을 지휘하고 온 사람은 사이메이 여자 천왕의 아들인 나카노에 황태자다(후에 텐지천왕). 645년 나카노에 황자와 부하들은 어머니인 고오쿄쿠천왕어전앞에서 100년간의 왜 실권자 소가씨(목만치의 후손)의 목을 베고 실권을 장악하며 황태자가 되었던 사람이다(을사정변).

백강전투에서 대패하자 나당연합이 왜열도까지 쳐들어 올 것을 두려워하여 텐지천왕은 축성을 하며 한반도와 교류를 단절하고 한반도를 적대시하기 시작하며 왜의 이전 역사를 각색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도를 침범하였다(임진왜란, 한일합방). 이 때부터 양국간은 교류가 끊기고 사이가 좋지 않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나 일본을 대신한 해양 세력 미국이 한국에 들어 옴으로서 일본-한국-미국의 연합에 의한 평화는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유지되고 있다. 반도의 남쪽 반에 미국이 들어 온 것은 중국에게 지배당하지 않고 일본에게 먹히지 않는 신의 한 수 일지 모른다.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영토에 대한 야심이 있고 중국은 한반도 속국화에 대한 야심이 있다. 그렇다면 답은 미국이 맞다.

텐지 천왕 사후 그의 동생인 텐무천왕이 쿠테타를 일으켜 집권하고 국호를 일본이라 하기 시작하며 일본서기를 편찬하게 하고 이전의 모든 부여계의 역사를 열도부여의 천왕 중심의 역사로 각색하게 된다. 7세기 중국 수나라 황제에게 일본 천왕이 보낸 고문서가 남아 있는데 그 내용은 해가 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가 지는 나라의 황제에게 보낸다고 하면서 별고 없으신가? 라는 당당한 내용으로 중화에게 꿀리지 않음을 분명히 하였다. 8세기 칸무천왕대에 완전히 부여계 천왕중심의 일본 중심 세계관을 성립한다. 정한론의 뿌리는 이 때부터 시작된 것이며 그들 조상의 땅인 한반도를 되찾겠다는 명분으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반도를 침략하였다.

무령대왕(왜왕 무)과 게이타이 천왕과 킨메이 천왕 이후 일본 천왕은 그의 후손이므로 현재 일본천왕의 피속에는 백제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일본천왕이 고백한 바 있다. 현 일본천왕의 동생인 왕세자가 실지로 무령왕릉을 참배한 바 있으며 일본 수학여행단이 무령왕릉에 다녀가고 있다. 일본의 일반백성들은 한반도 가야를 포함한 4국으로 부터의 1000년간 실인원 100만명의 이주민의 후손들로서 70%는 한반도에서 건너 간 사람들의 후예들이다. 오키나와 동남아계 원주민과 아이누족의 피가 일부 섞였고 중국대륙 남부에서 직접 구주로 간 남중국 피가 일부 섞였을 뿐이다.

일본이 힘 좀 커지고 잘 살게 되었다고 이런 역사를 억지로 왜곡하면서 한 때 큰 집을 몰라보면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다만 지진과 태풍 등의 자연의 재해가 많았던 일본열도에서 한반도에서 이주한 백성들이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더 강해지고 메이지 유신 후 노벨상을 많이 타는 과학의 나라가 되었고 세계적인 열강이 된 것은 분명하다. 6.25 때도 일본이라는 미국 병참기지가 없었다면 서울을 지키지 못할 뻔 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일본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만큼은 분명하다. 한때는 대륙세력이 한반도에서 승리하고 한때는 해양세력이 한반도에서 승리하다가 현재는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를 나누고 팽팽이 대립하고 있는 구도로서 쉽게 이 체제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1700년 전에도 이웃 집 드나들듯이 왔다 갔다 하던 한반도와 왜열도의 사이가 오늘 날 심리적으로는 오히려 멀어 진 듯한 것은 매우 역설적이나 실제로는 한반도는 대륙, 해양 양 세력의 완충지역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정한론의 뿌리는 부여계의 옜 땅인 한반도와 만주를 되찾겠다는 것이고 실제로 1900년대에 만주국을 세우고 한반도를 병합한 바 있다. 우리는 그것을 경계하여야 하며 미국이 없다면 일본의 그런 야심은 또다시 노골화할 것이다. 남한이라도 그들의 세력권에 잡아 두려면 댓가를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 중국은 북한을 먹여주는데 말이다. 일본은 663년 백강전투 후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대륙세력에게 빼앗겼다가 청일전쟁이래로 한반도 전체와 만주를 지배하였고 1945에 미국 해양 세력이 일본을 대신하여 남한에 들어 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륙세력과 대치하며 일본열도를 대륙세력으로부터 지켜주고 있다. 중국과 일본사이에서 역사적으로 완충역할을 해왔던 것이 통일 한반도였다면 현재는 그마저도 한반도의 허리를 잘라 각각 반은 자기들의 울타리로 삼고 있는 것이 서글푼 작금의 상황이다. 남북으로 우리끼리 싸우게 하고 일본은 안보 무임승차를 하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일본인들은 가야를 포함한 한반도 4국의 후손으로 어차피 동족인데 서로 잘 지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다만 올바른 역사는 공유하여야 한다. 한 때 구다라 즉 큰나라였던 한반도가 지금은 어떠한가를 되씹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일본에게 동양 3국은 중국, 일본, 인도를 의미하는 바와 같이 한국은 그들의 안중에도 없을 만큼 차이가 벌어져 버린 현실을 자각하고 절치부심하여야 한 때
큰 집의 자존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과학과 원천 기술과 소재 산업의 나라가 된 일본은 세계적인 위치에 올라간 지 이미 오래이고 역사이래 일본본토가 중국에게 지배받은 적이 없으며 중국과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동북아 해양나라인 것은 분명하다. 중국을 움직이려면 일본과 미국을 이용하여야 한다. 역사이래로 중국은 일본을 지배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대륙세력 중국에게 다시 속국으로 지배당하지 않으려면 해양세력인 미국과 일본을 이용하여야 한다. 일본에 지배당하지 않으려면 중국과 미국과 러시아를 이용하여야 한다. 미국을 콘트롤하려면 중국을 이용하여야 한다. 4마리의 사자에게 포위된 형국이나 어느 한 마리에게 독점적으로 먹히지 않으려면 4마리를 다 잘 다루어야 한다.

역사와 인문학을 모르면 불행한 역사는 반복된다.

901년 3500명의 군사들과 일심일체로 살고 마음을 얻어 장군으로 추대되며 고려를 세운 것은 궁예였다. 그랫던 궁예가 18년이 지나 918년 믿었던 부하였던 왕건에게 쿠테타를 당하며 비참하게 죽었다. 초지일관하지 못하고 말년에 민심을 잃는 빈틈을 보였고 자신의 자식과 대신들을 의심하여 죽이매 왕건도 목숨의 위협을 느끼게 되고 살기 위하여 흔들이는 민심을 구실삼아 쿠테타는 싹트게 되었다.

935년 신라가 고려 왕건에게 복속함으로서 후삼국은 고려로 통일되었고 고려초 민심을 얻으려는 노력은 압록강까지 구토를 회복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고려시대에는 불교는 개인의 수양에 필요하고 유교는 국가를 경영하는데 필요하였다. 그러나 종교인 불교의 신돈이 국가경영에까지 간섭하면 나라는 혼란스럽게 된다. 군주는 자기자신에게 엄격하고 솔선수범을 해야하며 신하를 예로서 대하고 신하는 군주에게 충으로 대한다면 나라는 건실하게 발전하였다. 종교는 종교로 남아야 국가가 혼란이 없다.

대장이 민심을 잃으면 믿었던 부하는 악화된 민심을 핑계대면서 반드시 반기를 드는 것이 역사적 필연이다. 10.26도 그런 류의 믿는 부하에 의한 암살이었다. 민심을 잃었다면 주위 부하부터 먼저 경계했어야 하거나 민심을 따르거나 해야 대장은 살아 남을 수 있다. 고려를 무너트린 이성계도 왕건의 쿠테타를 그대로 따라해서 조선을 열었고 귀족을 견제하며 일반백성의 민심을 얻으려는 조선초대의 피나는 노력은 세종의 한글창제로 승화되었다.

군주민수라 하여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라하여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어 버리기도 한다. 악화된 민심의 변화는 믿었던 부하가 더 빨리 알아차리고 반기를 들며 민심을 수용하는 절차를 밟을 뿐이다. 민심이라는 물이 출렁이면 배가 뒤집어 지는 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악군이 민심을 얻을 자신이 없게 되면 백성을 의도적으로 분열시켜 내편 니편으로 나누는 최악의 수를 두지만 현명한 백성들에 의하여 결국에는 악군은 무너진다.

4마리의 사자에 대하여 용 중국, 용 일본, 용 러시아, 용 미국이라는 유연하고 현명한 자세로 세상을 헤쳐나가야 하지 않을까? 헛된 지혜가 아닌 써먹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시국이다. 사즉생, 생즉사 라고 독려하면서 임란시 일본을 물리 친 이 순신의 자취를 살려가야 하며 솔선수범과 애민애족의 세종 같은 통합의 현군을 키워야 대한민국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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