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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와 일본신화
2017-02-05
고조선_>청도 이서국->가야6국->규슈
신라의 왕자 천일창과 스사노오->혼슈의 이즈모로 들어 가 이즈모신사를 만든다.
4세기 백제계->야마토

 
의생이 아닌 의사는 역사도 알아야 한다. 광명사상
2017-02-05
한반도에는 수 만 년 전의 구석기인도 있었고 수 천 년 전의 신석기인도 있었으며 3000년 전에 고인돌을 쌓은 청동기인도 있었다. 그들 토착인들은 문자로 기록된 역사를 전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청동기를 가지고 한반도로 내려 온 온 고조선, 부여의 북방 기마민족부터 역사는 기록되기 시작하였다가 중국 주나라 철기가 은나라 청동기를 무너트리는 시기에 철기와 기마전술을 가진 천손사상의 유목기마 집단과 투르크 훈족 피난민들이 만주를 거쳐 한반도에 들어 오기 시작하면서 역사가 적극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만리장성 이북의 북방 지역의 민족은 크게 5개로 구성된다. 투르크 훈족, 몽고족, 거란족, 부여족, 여진족 이다. 이들 중에서 부여족에서 북부여, 백제, 야마토 왜, 고구려가 나왔고 흉노 훈족과 고조선족에서 신라와 가야가 나왔다. 거란족은 요나라, 여진족은 금나라와 청나라, 흉노-몽고족은 흉노국과 원나라를 세웠다. 혈연적으로는 여진족과 왜인들과 훈족, 몽고족이 한민족과 가장 가까운 형제국이다. 그러나 한족의 피도 매우 많이 섞였다.

소위 한민족은 단일 민족이 아니다. 토착 구석기, 신석기인에 북방 기마 고조선-부여족, 훈족, 중국한족, 여진족, 왜인들이 합쳐져서 한민족이 형성되었다. 일본인도 단일민족이 아니다. 토착 동남아계 조몬인과 아이누족에 주로 부여 백제계와 고조선, 가야계의 도래인들의 혼혈이 일본인이 되었다.

고두막한 딸이 이끄는 진조선사람들과 진시황의 만리장성 축성에 동원된 오르도스 북서유목 훈족 고역민들이 동으로 탈출 이민하여 평양마한왕에게 의탁하니 소백산맥 넘어 진한의 땅에 들어 가 살게하였다. 이로서 진조선인과 북서 오로도스 훈족 유목민이 집단으로 소백산맥을 넘어 진한에 들어 가게 된다. 진조선인을 이끌고 진한에 들어 온 고두막한의 딸이 사로국 시조인 박혁거세를 낳고 이미 진한에 이민 온 오르도스 북서 유목 훈족민과 연합하여 경주에 사로국을 세운다.

BC 250년 경에 동명(해모수)이 흑룡강성 탁리국(고리국)에서 남쪽으로 탈출하여 송화강 평야 지역인 길림성에 부여국을 세우고 만주의 패권국이 되었다가 700년이 지나 고구려와 선비족의 협공으로 494년 없어진다. 북부여국의 정통성은 부여국의 형제국인 백제, 야마토왜, 고구려가 이어 받는다.

준왕의 번조선인과 송화강 유역의 부여국 일파가 동해안 루트를 타고 남하하여 청도 이서국을 세웠다가 경주 사로국에 쫓기게 되자 낙동강을 서쪽으로 건너 김해, 남해안 지역에 동복과 기마전통을 가지고 가야국를 세운다. 산동반도 투후국 김일제의 후손인 왕망의 신나라가 후한의 유수에게 망하니 김 왕망일행이 배를 타고 김해의 금관가야에 합류하여 김수로왕이 되고 일부는 왜의 규슈로 간다. 가야인들도 준왕의 번조선인과 부여족의 일파와 훈족 북방기마유목민의 전통인 동복과 기마전술을 가지고 내려왔다.

평야 지역인 송화강 유역의 부여국에서 산이 깊은 요동의 졸본부여로 망명한 헤무수의 4대 손인 주몽(추모)이 졸본부여왕이 되고 고구려로 개칭하며 국력을 키운다. 주몽의 졸본부여 부인인 소서노와 그녀의 아들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 왕권을 유리왕자에게 뺏기니 무리를 이끌고 1차 남하하여 한강유역에 마한내 소국 십제를 세운다. 200년이 지나 요동부여의 울 구태(구이)가 조조의 위나라에 쫓기어 부여족 본류의 2차 남하 이민을 이끌고 한강 십제를 병합하며 백제의 실제적 시조(고이왕)가 되며 백제를 비로소 세상에 알리게 된다. 이 때부터 부여의 시조인 해모수 동명왕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며 백제가 북부여를 승계하였음을 천명한다, 4세기 초에 잔류 요동부여의 근초고왕계열이 모용씨 선비족에 쫓기어 요동부여족 본류의 3차 남하 이민를 이끌고 백제에 합류하며 대국 백제가 된다. 494년 요동부여국이 완전히 망할 때까지 만주 부여족들이 지속적으로 백제와 야마토 왜로 남하 이민은 계속되었다. 494년까지 마지막 남은 잔여 요동, 요서 부여인들은 고구려와 선비족에 흡수된다. 백제는 요동 부여의 역사도 백제의 역사에 편입하여 요동 백제라 하였다. 마치 일본이 백제의 역사도 일본의 역사로 편입한 것과 같다.

기원전 45년 추모(고주몽)는 송화강 부여국을 탈출하여 요동의 요양(심양) 북쪽에 졸본부여로 망명하며 그곳 공주 소서노와 결혼하고 왕통을 받아 고구려라 개칭한다. 추모왕은 한족과의 싸움에서 40세에 갑자기 죽고 유리가 왕통을 잇는다. 왕통을 받지 못하여 억울한 소서노와 온조, 비류는 남으로 이민을 떠나 한강유역에 마한내 소국 십제를 세운다. 처음에 미추홀 인천에 나라를 세운 비류는 금강유역으로 남하하여 웅진(공주)에 비류백제를 세우고 진씨 성을 가지며 백제의 왕비족이 되었고 일부는 왜열도로 들어간다. 비류의 후손인 오진 웅진 백제후왕은 고구려 광개토왕의 웅진 공격에 396년 하동을 거쳐 오사카 지역의 야마토 왜로 피난을 가서 개척하며 오진천왕이 된다.

40세 한창 나이에 한족과의 싸움에서 갑자기 죽은 추모(주몽)을 기리기 위하여 소수림왕대에 부여국 시조인 동명신화를 그대로 모방하며 고구려 주몽신화를 광개토왕의 아버지인 소수림왕이 만들어 낸다.
이와같이 만주 패권국인 부여국은 고구려와 백제의 큰 집으로서 많은 영향을 주었다.

기원전 220년 경 진시황이 중국 천하를 통일하며 만리장성을 축조하는데 오르도스 북서쪽 투르크계 훈족 포로들을 동원하였는데 그들이 탈출하여 마한의 평양에 의탁하니 평양의 마한왕은 그들을 소백산맥 넘어 진한 땅에 들어 가 살게 하였다.

기원전 200년 경에 한고조 유방이 한족을 재통일하자 연나라 장수 위만이 인접한 번조선 기 준왕에게 망명을 왔다가 쿠테타를 일으켜 번조선에 위만정권을 세운다.
위만의 쿠테타에 쫓긴 번조선의 마지막 기 준왕이 한반도 평양에 들어 와서 한왕을 자처하며 삼한의 정세가 급변하자, 삼한의 끝인 서남해안의 마한인과 남해안의 변한인들이 벼농사와 청동기, 철기를 가지고 당시의 신대륙격인 왜열도로 1차 집단이주하기 시작한다.
일본이 주장하는 2500년의 역사는 바로 이 시기부터를 말하는 것이다. 그 당시 왜열도에는 벼농사가 없엇고 철기가 없엇으며 동남아 계열의 원주민과 아이누족이 채집농을 하고 있었다.

한고조 유방시대에 번조선은 위만정권이 세워지고 대조선은 송화강 유역에 동명왕 해모수의 북부여로 이어지며 한나라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항우를 잡은 유방은 여세를 몰아 북의 흉노를 쳤으나 오히려 포위되어 죽게 생기자, 흉노에 조공을 바치고 섬기기로 하고 포위에서 풀려났고 평생을 흉노에게 조공을 바쳤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나 한무제는 흉노를 쳐부시고 번조선 위만정권도 망하게 하며 만리장성 인접의 번조선 땅에 한사군을 세우고 여세를 몰아 북부여까지 쳐들어왔다. 당시 북부여 단군인 해부루는 겁을 먹고 동북쪽으로 달아 나서 가섭원에 동부여가 되었으나 졸본땅에서 고두막한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 그 공으로 고두막한 장군이 졸본에 작은 집격인 졸본부여로 재금을 나와 단군으로 추대된다. 부여국이 두 개로 쪼개진 것이다. 광개토왕대인 4세기 말에 동부여국은 작은 집격인 고구려에 거의 합병되다시피 되다가 요동부여로 피난하며 494년까지 겨우 명맥은 이어갔으나 거의 대부분은 백제로 피난 이민을 간다. 요동부여도 494년에 완전히 문을 닫고 523년 백제 성왕이 백제를 남부여라 하면서 만주 부여국를 계승함을 천명한 바와 같이 본류 부여국이 백제로 이어진 것이다. 만주 부여국은 이와같이 700년을 지속하며 고구려, 백제, 야마토 왜의 씨앗 역할을 하였다.

BC 57년경, 고두막한 졸본부여왕의 딸이 고조선 유민 6족을 데리고 진한의 경주에 들어 와 박혁거세를 낳고 사로국을 세운다. 진시황대의 북서 오르도스 황금 문화 전통의 북방기마족도 진한에 이미 들어 와 있었는데 박혁거세 부여세력과 연합하여 사로국을 키운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기원전후 한나라(전한)가 김일제 후손인 왕망의 신나라에게 망하는데 왕망은 한무제시대에 포로로 잡혀왔던 흉노 좌현왕의 왕자 투후국 금성에 김일제의 후손이었다. 왕망의 신나라가 20년도 안 되어 후한을 세운 유수에게 망하였고 왕망과 김씨 일파는 쫓기게 되며 산동반도에서 배를 타고 김해지역으로 들어 와서 김수로왕의 금관가야를 세우고 양자강 상류에 이민하여 살고 있던 인도 허황후를 왕비로 맞아 10 아들을 둔다. 그 중 큰 아들이 허황후의 동생인 이모와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나으니 대노한 김수로왕은 장자인 큰 아들을 내쫓아 나가게 하니 큰 아들은 경주로 들어 가서 석탈해왕을 몰아내고 신라를 세운다. 그가 바로 경주김씨 시조인 김알지이고 문무왕비에 나타나는 문무왕의 조상인 성현왕이다. 진한에 들어 와 같은 계통인 기존의 오르도스 북방민족 세력과 연합하고 경주 김씨 시조인 성현왕이 된다. 왕망의 신나라의 후손이므로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투후국 금성을 모방하여 경주를 금성이라 하였으며 김알지 일행은 왕망전이란 신나라 화폐를 가지고 와서 오늘날 발굴되고 있다. 그로부터 15대를 내려간 문무왕비에 이러한 신라 김씨 왕조의 그 내력이 기록된다. 한나라 고조 유방을 벌벌 떨게 하였던 흉노 기마민족의 기상을 가지고 내실을 다지면서 국력을 점차 키운다.

360년 내물왕부터는 사로국 시조인 박씨와 석씨를 따돌리고 김일제의 후손인 김씨가 신라왕을 세습하기 시작하며 세상에 신라라는 이름을 알리게 되며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360대는 한반도 최초의 정복왕인 근초고왕의 백제가 한반도의 패권국으로 남서해안의 마한과 가야를 복속시켰고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전사한 고국원왕을 복수하기 위하여 그 손자인 광개토왕이 일어서서 백제를 친다. 이와같이 30여년이 지나 광개토왕의 고구려가 한반도의 패권국을 이어 받으며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였다. 391년 신라 내물왕은 실성왕자를 광개토왕의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고 자세를 낮추어 고구려의 공격을 피하면서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백제는 고구려에 대항함으로 광개토왕은 백제를 치게 되고 많은 금강유역 비류 백제인들과 한강 백제인들은 살기 위하여 당시 형제국인 왜열도로 대거 피난을 가서 고대국가 야마토 왜를 세운다. 이 시기에 일부 왜열도도 백제계로부터 빼앗아 고구려계가 지배하고 일부는 백제계가 지배하는 왜열도 남북시대를 거쳐 백제계 곤지가 460년에 왜열도를 백제계로 재통일하였고 660년까지 200년 동안 백제계가 지배하였다. 백강전투에에서 지면서 일본은 한반도와 교류를 끊고 섬나라 근성의 배타성을 키웠다.

졸본부여 창업자 고두막한의 아들인 고무서 대에 아들이 없었고 소서노라는 청상과부 공주가 있었다. 북부여로부터 고 주몽(추모)이 졸본부여로 망명을 하여 청상과부인 소서노 공주와 결혼을 하고 고무서에 이어 왕통을 받아 졸본부여의 7대 단군이 되고 국호를 고구려라 개칭하며 영토를 확장한다. 이런 유래로 한서에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라 하였고 산악지대여서 농산물이 부족함에 따라 매우 호전적이고 공격적이었고 남북으로 영토를 적극적으로 확장하였다.

동부여에 있을 때 낳았던 유리왕자가 졸본부여의 고주몽을 찾아오매 유리를 태자로 삼는다. 추모(주몽)은 한족과의 싸움에서 갑자기 죽고 유리가 왕으로 즉위한다. 억울한 소서노 소생의 비류와 온조는 모친인 소서노와 100가를 데리고 남하하여 백제의 시초인 십제를 마한내의 소국으로 한강유역에 세운다. 그렇게 마한내의 소국으로 200년을 지나고 나서 요동부여에서 부여본류세력인 부여왕족 구태가 대거 남하 이민하여 한강 십제를 합병하며 고이왕 대국 백제가 되고 한강 주변 마한를 무너트리며 백제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그 때부터 부여국의 시조인 동명왕(해모수)을 제사지내면서 부여국의 후계 정통성을 이었음을 표방한다. 이와같이 백제국의 실질적인 시조는 부여왕 구태(고이왕)이다.

그 전에는 마한내 소국인 십제로 존재하였을 뿐이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마한내의 작은 소국이었다. 요동 부여 세력인 구태가 남하하여 마한내 소국 십제를 병합하면서 요동부여의 역사도 백제에 포함시켜 요동백제라 하였으며 요서백제도 만주부여 잔류세력이 세운 것이고 한성백제의 하나의 담로(다무로) 였다. 이와같이 백제라는 말과 부여라는 말은 같은 의미로 혼용하여 사용되었을 만큼 둘 사이에 관계가 깊다. 요동부여의 역사도 백제의 역사로 통합하여 보았던 것이다. 마치 일본이 백제의 역사도 일본의 역사로 보았던 것과 비슷하다.

고주몽이 싫어서 졸본부여를 떠나서 내려 온 온조와 비류는 엄밀히 말하면 부여본국의 왕족은 아니고 고구려의 방계이었으나 구태는 부여본국의 왕족이었다. 구태도 고구려에 쫓기어 내려 온 것은 비슷하였다. 그런 점에서 두 세력은 연합할 수 있었고 대국백제를 세운다. 구태로부터 백제는 부여본국을 계승하엿다고 하면서 부여국 시조인 동명왕(해모수)을 제사지내며 부여국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음을 표방하고 고구려를 방계 작은 집으로 보았기에 양국간에 정통성을 두고 적대관계는 수 백 년 간 지속되었다.

처음에 미추홀 인천에 자리잡은 비류백제계 진씨(백제 왕비족)는 더 좋은 땅인 금강유역지역으로 남하하여 웅진백제후왕을 하고 일부 집단은 남서해안을 따라가다가 임나가라를 거쳐 규슈와 야마토 왜로 들어간다. 기원전후시기에 이미 비류백제계인들도 가야 및 마한계와 같이 왜열도에 터를 잡기 시작하였다. 한성부여백제계는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근초고왕대부터 왜열도에 들어가게 된다.

번조선과 부여국의 또 다른 일파가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청도 이서국을 세운다. 서기 42년 이서국은 경주 사로국과 싸움에서 밀리자 낙동강을 건너 서쪽으로 피난을 가서 가야6국을 세운다. 김해 금관가야 시조 김수로왕대에 인도에서 중국 보주로 망명하여 살고 있던 허황후 일행이 장강을 출발하여 김해로 와서 이 둘은 혼인하고 여러 아들을 둔다. 인도에서 가져 온 쌍어문을 김수로왕릉에 남겼다. 562년까지 500년간 지속하였던 고대국가 가야에 대하여 역사는 너무 소홀히 대하고 있다. 일본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왜열도 초기이민 가야인들이다. 역사에 기록되는 진구천왕은 백제 웅진 백제후를 하던 오진이다.

김수로왕의 동생과 일부 아들들은 기마유목민의 전통인 구지봉 천손강림의 광명사상을 가지고 규슈로 갔고 고령의 대가야와 다른 가야에서도 왜 열도로 많이 들어가서 각 지역에 일본건국신화를 만들어 내는데 그 신화속에는 실제의 가야계이민 역사가 그대로 녹아있다.
이들 각 가야계 왕족들은 왜열도에 150여개의 호족 소국을 세운다.
야마테우스(천조대신)과 그의 후손 니니기는 가야계의 왕족을 신격화한 것이다.
일본인의 시조인 이즈나기, 이즈나미 부부는 가야계이다.
소설처럼 기록된 1대 신무왕부터 10대 숭신왕까지의 역사는 가야계이민의 희미한 기억을 후대에 기록하다 보니 어느정도는 창작된 점도 있을 수 있으나 초기 호족들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11대부터는 백제계가 천왕을 하기 시작하였고 15대 오진천왕부터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오진은 말년에 왜로 들어 가 호무다 천왕을 한 백제의 근구수왕일 수도 있고, 근초고왕일 수도 있고 광개토왕에게 토멸당하고 왜로 망명한 진씨 성의 오진 웅진백제후왕일 수도 있다. 이 3명을 모두 통칭할 수도 있다. 왜로 망명한 오진 웅진백제후왕도 근초고 처남이거나 외손이다.

신라의 왕자 천일창과 가야계 스사노오가 혼슈의 이즈모로 들어 가 이즈모신사를 만든다. 혼슈 이즈모에 신라계는 소수여서 규슈에서 북진 한 가야계에 흡수 통합된다.

BC 3세기부터 AD 4세기 까지 가야계와 남서해안의 마한계와 비류백제계는 왜 열도에 호족 중심의 150여개의 소국을 건설하며 초기 한반도인의 이민 역사가 녹아 있는 일본건국신화를 만든다.

만주 북부여의 본류를 이은 동부여는 5세기까지 요동부여로 옮겨 존재한다. 조조의 위나라에 밀려 3세기 부여왕족 구태는 요동 부여계를 데리고 남하하여 한강 십제를 병합하며 대국 백제의 실질적인 시조(고이왕)가 되었다. 4세기에 모용씨 선비족의 공격으로 요동부여의 수도가 함락되자, 요동부여계의 3차 남하를 이끌고 백제에 합류한 백제 전성기 근초고왕계가 야마토 왜를 개척하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평양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켰으며 가야와 남서해안의 마한과 탐라를 복속시키고 신라를 침범하였다. 이 때 신공황후의 왜인 용병들의 도움을 받았고 근초고왕은 그 기념으로 왜나라에 칠지도를 하사한다. 신공황후는 근초고왕의 며느리이거나 왜국 부인일 가능성이 높다. 근초고왕의 백제는 만주부여 본류로부터 나온 정통 부여계이고 야마토 왜에 또 다른 형제국인 부여분국 다무로(담로)를 건설하였다. 왜나라에게 구다라 즉 큰나라였던 백제는 왜나라의 큰 집인 본국이었고 뿌리였다.

백제 근초고왕-근구수왕에 이어 한반도 패권을 차지한 고구려 광개토왕이 396년 백제를 공격하여 쑥밭으로 만들자 공주 백제후왕(비류백제계 진씨)이던 오진이 무리를 이끌고 하동을 거쳐 왜열도로 피난 망명을 하게 되며 더 많은 백제인들이 왜열도로 들어 가서 야마토 왜를 세운다. 백제 전지 왕자는 백제와 야마토 왜 사이에 무역을 중개하였다. 396년부터 이어진 442년 야마토 왜의 왕통이 오진의 진씨에서 비유왕의 아들인 부여씨 사이와 곤지에게 이전된다. 사이는 한성백제로 귀국하여 개로왕이 되고 곤지는 왜에 남아 460년 고구려계를 무찌르고 왜를 재통일한다.

399년 이때 왜로 가기 위하여 임나가라에 모인 백제유민들과 왜인들이 경주를 위협함에 신라를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고 광개토왕은 399년에 5만의 보기병으로 임나가라의 종발산까지 내려와서 김해금관가야와 부산 임나가라도 쑥밭으로 만들고 연나라의 침입으로 급히 돌아간다. 만주부여국인과 백제인의 왜열도로 피난 이민은 고구려 광개토왕의 팽창이 만든 것이다.

5만의 고구려병이 가야와 신라에서 물러간 후 또 다시 왜인들이 신라를 침입함에 신라는 미사흔왕자를 인질로 왜에 보낸다. 박제상은 왜로 가서 미사흔왕자를 신라로 도망시키고 본인은 잡혀서 왜에서 죽으며 역사에 신라의 충신으로 남는다. 그의 부인은 그를 기다리며 울다가 망부석이 되었다고 한다.

4세기 말부터 광개토왕과 장수왕이 백제를 남으로 밀어 붙이면서 5세기 말(475년)에 마침내 한성백제 개로왕이 전사하고 공주백제가 되면서 한성 부여계 백제인은 야마토 왜로 더욱 많이 피난을 간다. 신공황후의 아들로 규슈에서 태어 났다는 백제계 웅신왕(오진)은 397년에 야마토 왜로 들어 가 기존의 선착 비류백제계 니기하야이(왜진왕)와 합쳐서 왜 열도에 처음으로 고대국가 야마토왜를 건설한다. 사실은 396년 광개토왕의 금강지역의 공격으로 공주의 백제후왕 오진이 규슈로 피난을 갔다가 북상하여 혼슈의 오사카 갯가를 개척하며 야마토 왜를 세우는데 규슈에서 태어 난 것으로 후세에 각색을 한 것이다. 오사카는 이민간 백제인들이 간척하여 만들어진 도시이다.

단, 신공황후가 백제 근구수왕의 후비가 되었기 때문에 오진이 그들과 혈연후손관계일 수는 있다. 사냥만을 즐기고 고구려침공에 소홀한 백제 진사왕을 죽이고 아신왕을 세웠다는 왜의 오진천왕의 정체가 말년에 왜로 들어 가 호무다천왕을 한 근구수왕일 수도 있고, 오진이 웅진(공주)백제후왕 시절에 진사왕을 죽이고 아신왕을 세운 후에 광개토왕의 공주침입으로 왜로 피난을 가서 왜역사에 그런 자신의 과거의 공주에서의 역사를 기록하였을 수도 있다. 일본서기에 오진천왕은 100년을 통치하는데 여러 명의 천왕의 역사를 포함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 당시에는 백제왕이 왜왕을 겸임하기도 하였으므로 근초고왕과 근구수왕도 오진천왕이 될 수 있고 웅진백제후왕을 하다가 왜로 피난간 백제후왕도 오진천왕이 당연히 될 수 있다. 재위 연도를 보아도 이 세 명을 다 포함한다고 보아야 한다.

아신왕대의 402년 백제의 아직기는 말(horse)을 가지고 왜 열도에 들어가서 기마 전술을 처음으로 왜에 보급하고 왕인박사는 천자문을 가지고 왜로 들어 간다. 402년 이전에는 왜 열도에는 말(horse)이 없었다.
이때부터 백제왕자들이 말을 타고 기마전술로 왜열도를 더욱 더 복속시킨다.

399년경에 광개토왕은 신라를 속국으로 하여 5만 기병으로 남진하며 낙동강산 철무역으로 큰 부를 쌓은 금관가야와 임나가라의 종발산까지 쳐들어 가서 막대한 부를 다 뺏어 가고 백제유민과 가야계 왜인들이 신라경주를 침범하지 못하게 약화시킨다. 고령의 대가야는 이 때 피해를 입지 않아 가야연맹의 주도권을 가져간다.

장수왕이 475년 한성백제의 개로왕을 참수할 때 곤지왕과 무령왕자는 이미 왜열도에 가 있었고 곤지는 왜열도를 백제계로 재통일하고 20년간 웅략왕으로 야마토 왜를 다스리고 있었으며 이어서 무령이 왜왕 무가 되어 24년을 재위하다가 백제로 귀국하여 무령대왕이 되고 곤지의 아들인 게이타이왕(남제왕)에게 야마토 왜의 재위를 물려준다. 왜나라에서는 곤지가 백제계로의 재통일의 영웅이었다.

공주로 남천하며 문주왕을 세운 백제 대신 목만치(근초고왕 때 가야정벌한 목라근자 장군의 후손)는 이 혼란한 시기에 왜로 건너 가 소아씨의 시조가 되고 100년동안 왜조정의 실권을 장악한다. 공주로 남천한 문주왕와 삼근왕은 2년만에 토착 비류백제계인 해씨에게 암살당한다. 왜왕을 하던 부여계 당시 큰 어른 곤지도 혼란한 공주백제를 수습하기 위하여 웅진에 나왔으나 역시 몇 개 월만에 암살당한다. 곤지에 이어 왜무왕을 하고 있던 무령은 곤지의 아들인 다마를 공주로 보내 동성왕으로 세운다. 동성왕도 20년을 재위하다가 피살당한다. 이에 24년간 왜무왕을 하고 있던 무령은 직접 공주로 나와 무령왕이 되어 웅진백제를 안정발전시킨다. 1500년이 지나 공주의 무령왕릉이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세상에 나타나며 자신의 이름이 사마라고 하는 지석으로 역사책에 쓰인 것이 사실임을 스스로 증명하였다. 663년 백강전투 당시 한반도에 온 천지천왕도 후퇴하면서 조상인 무령왕릉에 어찌 다시 참배할거나 라고 탄식하였던 바와 같이 무령왕은 일본천왕가의 직접적인 조상이다.

고구려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팽창이 백제계 및 가야계 왜열도 이민을 더욱 촉진하여 역설적으로 고대국가 야마토 왜를 만들게 해주었다.

502년 야마토 왜에서 24년간 왜왕 무를 하다가 백제로 돌아 온 공주 백제 무령대왕은 국력을 어느정도 회복하여 아산만까지 회복하고 임나가라(부산)까지 백제세력권에 다시 넣으며 야마토 왜의 게이타이 왕(남제왕)에게 청동거울을 보낸 것이 오늘날 발견되었다. 현재 일본천왕의 피속에는 무령왕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현재 천왕자신이 고백한 바가 있다. 12세기부터 천왕가는 실권을 쇼군이나 수상에게 넘기고 상징적인 존재로 남음으로서 오늘날까지 살아 남았다. 자신들의 천왕을 섬김으로서 중국의 황제에게 굴복하지 않는 이데올로기를 만들며 중국과 대립할 수 있었다. 일본은 대륙세력에게 한 번도 지배받은 적이 없다. 그런 프라이드는 일본을 중국과 싸울 수 있는 나라로 만들게 해주었다.

김부식은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본기를 삼국사기에 기록하는데 본기란 황제의 역사를 기록할 때 쓰는 용어로서 이 삼국을 황제국으로 보았고 삼국사기를 완성하여 고려 황제폐하에게 바쳤던 바와 같이 고려때만 해도 황제국이었으나 조선은 스스로를 제후 왕국으로 격하하고 명나라를 마치 하늘같이 섬기면서 하늘에 제사지내는 권리를 서슴없이 버렸다. 청나라가 약화되자, 고종이 대한제국을 열며 명목상으로는 황제국으로 환원한 바가 있었으나 힘이 없는 허울뿐인 황제국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일제의 먹이가 되기 쉬웠다. 중국의 보호가 사라지며 일제의 강점이 뒤따라오고 나라가 없어지며 일본에 합병되었다. 옛 상국의 보호가 없어지면 새로운 상국이 들어 오는 쳇바뀌는 계속되어 일제로부터 나라를 찾아준 것은 또 새로운 상국인 미국과 소련의 무력이었다. 그 댓가는 남북분단이었고 이어진 동족상잔의 6.25 국제 전쟁이었다. 북은 대륙세력의 울타리가 되었고 남은 해양세력의 울타리가 되었다.

백제의 망조는 무령왕의 아들인 성왕대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다. 즉,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하여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한강유역에서 몰아 냇으나 신라의 역습으로 신라에게 다시 빼앗기게 된 것이다. 신라만 좋은 일 시킨 꼴이 되었다. 신라를 결정적으로 키운 것은 역설적으로 백제의 성왕이었다. 더구다나 그는 관산성전투에서 신라군에 잡혀 죽는다. 이 시기에 가야에 대한 지배권도 신라에게 빼앗기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신라는 한강유역과 낙동강 서쪽 가야까지 영토를 넓히고 결정적으로 성장하였다.

532년 신라는 백제 성왕의 지배를 받고 있던 금관가야에 쳐들어가서 김유신의 조부가 마지막 왕인 금관가야는 완전히 문을 닫고 신라에 편입된다. 김유신의 부친인 김무력은 진골로 편입되어 백제로부터 빼앗은 한강유역의 장수가 된다. 신라는 금관가야 김무력 세력을 가야에서 멀리 떨어진 한강유역의 장수로 보냄으로서 가야를 더 확실히 지배할 수 있었다. 이와같이 가야에 대한 백제의 지배권을 빼앗긴 것도 백제 성왕대이다.

이와같이 백제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은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유역을 고구려로부터 되찾았으나 신라에게 되빼앗긴다. 성왕은 신라배반에 응징하고자 하였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오히려 죽는다. 이 혼란기에 성왕의 3째 아들인 임성태자는 왜열도로 들어 가 백제군을 세우고 한 지역을 다스린다. 15세기 서일본의 패권자인 오우치가의 시조가 되엇고 도요타 차로 유명한 도요타씨도 그 방계이다. 이로서 백제는 가야의 지배권을 신라에게 완전히 빼앗기기 시작하고 국력이 역전되며 신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고구려와 동맹을 맺는다. 백제가 고구려와 동맹을 맺자, 백제는 당나라에게 밉보이게 되고 멸망의 길로 들어 선다. 적의 친구도 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백제의 공격으로부터 살기 위하여 당나라와 동맹을 맺는다. 횡축의 동맹과 종축의 동맹간의 동북아 국제 전쟁이 시작된다.

562년 신라는 마지막 남은 고령의 대가야 마저 무너트리고 가야연맹을 완전히 신라에 통합하며 국력이 급격히 커진다.

600년대에 백제는 실지를 회복하고자 고구려와 동맹하여 신라를 계속 공격하고 남북조시대를 통일한 북조의 수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수나라가 먼저 무너진다. 고구려도 간신히 방어는 해냈으나 이미 만신창이가 된다. 이어서 당나라도 고구려를 계속 공격하였으나 연개소문에게 3번이나 대패하자, 전략을 바꾸어 신라와 연합하여 상대적으로 약한 백제를 먼저 치게 되고 그 전략이 성공한다.
백제가 고구려와 동맹을 맺은 것이 백제가 망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적의 친구도 적으로 본 것이다. 즉 당나라의 표적이 된 것이다.

특히 의자왕은 망하기 7년전부터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지 않았고 합천 등의 신라땅을 공격하며 당나라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합천공격같은 작은 성공에 도취되고 자만하여 당시 패권국인 당나라까지 무시하는 외교적으로 이미 망조를 자초한 것이나 다름아니었다. 육지로는 고구려가 방패가 되니 당나라가 대군으로 쳐들어 올 수 없다 고 방심하였으나 15만의 당 수군으로 서해를 건너 직접 쳐들어 오는 것을 대비하지 못한 외교군사적으로 매우 어리석은 소아적인 군주라고 볼 수 밖에 없었다.

고구려에 붙은 것도 매우 어리석은 외교적 판단으로서 백제가 망할 때 고구려는 전혀 돕지 않았다. 고구려는 애초부터 백제를 도우는 나라가 아니었고 수, 당과의 전쟁으로 이미 골병이 들어 만신창이가 되어있엇다.

660년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형식으로 15만의 당군과 5만의 신라군을 합한 20만 대군의 나당연합으로 외교적으로 어리석은 의자왕의 백제를 먼저 무너트린다. 백제는 그대로 왜로 피난합류해갔다. 이때 고구려는 백제를 돕지도 않았다. 따라서 신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고구려와 동맹을 맺은 것은 백제의 실책이었다. 망하기 7년 전부터 당나라에 조공도 바치지 않고 고구려에 붙으니 당은 백제를 그냥 놔둘 수 없게 되고 15만의 당군이 백제를 치니 백제는 무너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3년이 지난 663년 백강전투에서 백제부흥군을 원조한 왜수군 3만명이 당나라수군에게 패함으로서 백제는 완전히 망하고 대거 왜로 피난을 간다. 이로서 북부여의 정통성은 왜열도로 완전히 갔다. 백제가 망하고 20만명의 백제인들이 당시 백제 형제국인 왜로 망명을 갔다.

백제가 없어지면서 남쪽에서 신라를 견제할 세력이 없자, 당과 신라에게 남북으로 협공당한 고구려도 668년에 무너진다. 당시 고구려 수도 평양은 현재의 심양(요령)으로서 요동지방에 있었다. 무너진 고구려의 상당수는 대조영을 따라 동쪽으로 800Km를 도망쳐서 여진족과 연합하여 발해를 세웠고 나중에 당나라로부터 다시 심양(평양)을 빼았으며 부여국과 고구려를 계승하였다고 천명한다. 중국에 대항할 수 있는 발해가 망한 후부터 한반도에는 중국에 대항할 수 있는 나라가 세워진 바가 없었고 해양의 나라 일본만이 중국에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 가야계와 북부여 백제계의 연합의 나라인 일본만이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 남게 되었다.

수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일본 국서에서 해가 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가 지는 나라의 황제에게 그간 별고 없으신가 라는 담대한 자세가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일본은 중국에게 머리를 조아린 적이 없었다. 원나라 전성기에 여몽연합군이 대대적으로 규슈를 침략하였으나 신풍이 불어주고 일본이 반격하여 여몽연합군이 대패한 바도 있었다. 이런 역사가 일본의 프라이드 근거이다.

660년 백제가 망하고 663년 최후의 백강전투에서 당 수군과 왜 수군 전투에서 왜가 패함으로서 백제는 완전히 문을 닫는다. 왜군단이 후퇴하면서 3000 여명의 백제유민들을 태우고 야마토 왜에 정착시킨다. 백강전투에 왔다가 간 천지왕에 이은 천무왕은 국호를 일본으로 고치고 왜왕을 버리고 천왕을 자처하며 이전의 백제의 흔적을 지우고 새로운 일본의 역사를 쓰라고 하여 일본서기, 고사기가 쓰이게 된다. 백제의 흔적을 지운다고 했지만 그 흔적이 여전히 남게 되었다. 왜는 백강전투에서 지기는 했지만
당나라에게 3만 수군의 규모의 힘을 보여주며 왜열도까지는 당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는 보았다. 대륙을 적대시하고 배타적인 섬나라 근성이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지진과 태풍이 없는 한강과 금강의 아름다운 이 땅에 대한 일본의 영토적 야심은 백강전투 이후에도 지속되다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한일합방도 하였으나 2차대전 후에 세계 패권국 미국에게 그 권리를 넘겨주며 간접적으로나마 아직도 영향권을 유지하려고 한다.

백강전투는 그 당시 최대의 국제전으로 동북아 판세를 결정하였으며
오늘날까지 그 판세는 유지되고 있고 오늘날 휴전선이 만들어 지며 한반도중앙이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대치점이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지진과 태풍이 없는 아름다운 한강유역과 금강유역의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영토적 야심은 백강전투 패전 후에도 지속되어 왔다. 조선조까지 한반도는 대륙세력의 속국적 일원이 됨으로서 이런 일본의 영토적 야심을 방어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청나라가 무력화되자 일본은 곧바로 조선을 합병하여 영토적 야심을 채웠다. 일본제국주의는 망하면서도 한반도 남쪽의 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미국에 인계함으로서 해양세력의 울타리로 삼고 자 하였다. 미국이 떠나면 일본은 반드시 한반도에 들어 온다. 그들은 백제의 역사를 자기들의 역사로 보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한반도 북부의 역사를 자기들의 역사로 보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대동강 이남의 신라는 대동강 이북의 발해와 대립하며 200년간 지속되었다가 후삼국으로 분열된 후 고려 왕건이 재통일하고 거란(요나라)에게 망한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여 요동까지도 수복하였다. 고려는 북방영토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하여 거란, 금나라, 원나라와 맞서 싸웠다. 중국이 남 송, 북 거란(요나라)으로 분열한 고려 초기에는 고려가 외교권이 있는 자주국 황제국으로 존재하였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 당시도 고려는 황제국이었다. 이 시기에 여진족이 고려로부터 독립하며 거란을 물리치고 금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고려는 금나라에게 영토는 양보하지 않았다. 징기스칸의 몽고가 북의 금나라와 남의 송나라를 제압하며 중국이 원나라로 통일된 이 후부터는 부마국으로 전락하며 외교권이 없는 자치적 속국이 되기 시작하였으나 고려는 황제국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몽고군은 북경을 포위함에도 항복하지 않은 굶어 죽기 직전의 30만명의 한족을 몰살하였다. 이 공포는 주위국들에 전달되며 고려도 항복하고 원나라의 부마국되며 연명하였다. 100년간의 원나라는 한족을 철저히 탄압하면서 같은 계통인 고려는 부마국으로 대우하여 주었다. 원나라의 함경지방 관리였던 고려말 이성계 가문이 함경도 고려인과 여진의 세력을 가지고 고려로 귀의하여 두만강까지 회복시켰으나 위화도 회군으로 요동은 명나라에게 넘기고 압록강-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조선을 열고 황제국을 스스로 포기하며 제후국인 왕이 되면서 명나라의 자치적 속국이 되었다. 이 때부터 조선은 외교권이 없었다.

조선에게는 함경도는 성지나 마찬가지로 반드시 지켜야 하였기에 조선초기에 경상도 차남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정착시켰다. 함경도 말씨는 경상도 말씨와 매우 유사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조선은 단군이래로 내려 온 기마민족 천손사상의 황제국을 버리고 소중화 사상을 신주처럼 모시면서 명나라를 사대하며 스스로 속국(제후국)이 되었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유목민 천손사상을 가진 유일한 나라는 천왕의 나라 일본만 남게 되었다. 세종 때 신숙주도 일본을 갖다 와서 일본의
세력이 크므로 화평하게 잘 지내는 것이 좋다고 간언하였다. 그로부터 100년 지나 임진왜란으로 일본의 대대적인 침략이 있었다.

정명가도라 하며 명나라를 치려하니 길을 빌려달라며 한반도에 들어 온 왜군은 평양까지 올라갔다가 이순신의 차단으로 보급이 어려워지고 명나라군의 참전으로 왜열도로 다시 물러났다. 이와같이
임진왜란 당시에도 명나라의 힘을 빌려 일본 침략군을 한반도에서 밀어낼 수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근대에도 일본제국군대를 미국과 소련의 힘을 빌려 한반도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한반도내의 힘만으로는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방어할 수가 없다. 중국이든 미국이든지간에 한반도에 끌여들여야 일본을 막을 수 있었다. 그 만큼 일본은 한반도에 버거운 상대로 성장해버렸다.

임진왜란 강화협정 당시에 히데요시는 조선8도중에 남쪽 4개도를 달라고 명에게 요구하였다. 그 선이 정확하게 38도 선에 일치한다. 남북분단의 씨앗은 이와같이 역사가 깊다. 중국은 북한이라는 완충지역이 절대로 필요하고 왜열도에게는 한국이라는 완충지역이 절대로 필요하여 일본을 대신하여 미군이 들어 와 있을 뿐이다. 왜군이 평양을 점령하자 명나라는 지체없이 압록강을 넘어 참전하였고 미군과 국군이 평양을 점령하자 중공군은 압록강을 넘어 참전한 바와 같이 중국은 북한이라는 완충지역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시점에서 통일은 불가하니 서로 싸우지나 말고 각자의 대국들에게 그 댓가가 충분히 받아 먹어야 옳지 않은가.

천손사상과 황제사상은 서로 싸울 수 밖에 없다. 천손은 황제에게 굴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늘의 아들이 어떻게 인간의 우두머리에게 머리를 조아리겠는가?

북부여(만주부여), 고구려, 발해가 망함으로서 만주의 땅은 중국세력에게 영영 빼앗기고 반도에 축소된 작은 나라가 되고 말았다.

중국에서 북방과 남방이 분단되어 대립하는 구도에서는 한반도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으나 통일대륙국가가 되면 고구려가 망한 후로는 한반도가 그들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주와 중국대륙이 합쳐진 통일대륙국가 진나라, 한나라, 당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에게 사대를 하면서 자치권은 유지하였으나 일본제국주의에게는 나라가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다. 통일중국세력은 한반도를 속국으로 삼되 영토에 대한 야심은 없었으나 일본은 한반도를 병합하려는 영토에 대한 야심이 백강전투 패배이후부터 항상 있어왔다.

일본은 한반도를 발판으로 만주국을 세웠고 중국본토를 침략하였으나 미국을 공격하는 무리한 수를 두면서 미국과 중국과 소련의 협공으로 왜열도로 후퇴하고 만주와 북한은 완전히 포기하면서도 반도를 중앙에서 잘라 남쪽만을 미국에게 넘겨서 대륙세력에 대한 방패로 삼고 자 하였다. 지금도 일본은 북부여계의 후손임을 내세워 만주와 한반도를 그들의 고토로 인식하고 있다. 미국이 원자탄을 투하하자 그 동안 눈치만 보고 있던 소련군도 일제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와 한반도로 밀려 들어 와서 점령하였는데 미군은 아직 오키나와에 있었다. 그대로 놔두면 한반도 전체를 소련군이 점령할 판이었다. 미국은 소련에게 38선에서 멈출 것을 요구하였다. 소련은 그 당시에는 원자탄이 없어 같은 연합국인 미국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여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은 38선에서 만나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대치중이다.

고려초기때는 중국이 거란(요나라)과 송나라로 남북 분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외교권이 있는 자주성을 가지다가 통일 원나라가 들어서면서 부마국으로 전락하여 자주권과 외교권을 잃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황제국을 유지하였다.

힘이 커진 일본은 고려때도 끊임없이 반도를 침범하여 서남해안의 도서지방에 대한 고려의 통치권은 이미 상실되었었고 조선조에는 임진왜란으로 전면적으로 침입하였으며 20세기에는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없애기도 하였듯이 한반도 영토에 대한 야심이 있어왔다. 한일합방을 환영한 사람들도 많았다. 조선말의 썩어빠진 세도 봉건정권에 환멸을 느낀 대부분의 중인들과 평민과 천민들은 신분제도를 없애는 일제의 지배를 오히려 환영하였다. 백성들을 착취하는데 정신이 없었던 썩어 빠진 왕족과 노론의 지배 양반들은 일제의 귀족으로 변신하여 권력과 부를 계속 누렸다. 일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한 사람들은 정치적 야심이 있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박정희도 일제의 혜택을 받아 장교가 되었던 사람이다. 구체제 봉건독재보다는 일제의 지배가 평민이나 중인들에게는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서구제도를 맞볼 수 있는 새로운 제도였다. 특히 중인과 평민과 천민들은 신분의 굴레를 벗을 수 있어서 일제를 적극적으로 환영하였다.

국민학교라는 학교가 세워지고 비로소 평민들도 교육을 받아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양반들의 교육에 대한 독점이 깨졌다. 평민들은 무식할 수록 지배하기 쉽다는 봉건 왕조의 정책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경부선 등의 철도가 놓여지고 신작로라는 도로가 만들어 졌다. 봉건왕조독재 체제로서는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졌다. 일제라는 과도기를 거쳐 미국의 서구 민주주의가 도입될 수 있었고 주권재민의 전통은 시작되었다.

일본제국주의가 미국에게 패망한 또 다른 이유는 중국대륙에서 중국군과 싸우느라 일본군의 반이 중국에 묶여 있었던 것이었다. 미국과 중국에게 협공당하는 구조에서 일본제국주의가 몰락하는 것은 단 5년이라는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원폭을 맞은 직후부터는 눈치를 보던 소련마저도 일제를 협공하여 사할린과 만주와 북한을 접수하였다. 세 마리의 사자 대 한 마리의 사자가 싸울 때 승부는 이미 결정이 난 것이다. 따라서 일제의 하와이 기습은 전략적으로 빵점이었고 우리에게는 행운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국력이 어느정도는 커져서 사슴에서 벗어 나 표범정도는 되었으나 4마리의 사자에게 포위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중국은 위협이 될만한 주변국가를 거의 흡수합병하여 버렸다. 내몽고 지역의 흉노와 원나라 후예들을 합병하였고 부여, 고구려 일부와 발해와 여진족의 금나라, 청나라를 흡수하였으며 거란족의 요나라를 흡수하였고 티벳을 합병하였으며 위구르를 흡수하였다. 중국에게 위협이 될만한 유일한 주변국은 일본만 남게 되었다. 일본은 미국과 동맹하여 중국에 대항하고 있다. 한반도 남쪽 반의 대한민국은 해양세력의 최전선을 맡고 있고 북한은 대륙세력의 최전선을 맡고 있다. 대륙국가가 해양국가를 이길 수는 없다. 그래서 중국은 해양국가로 변신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으나 그 콧배기에 일본과 한국, 대만 등이 있고 미국이 뒤에 버티고 있으니 중국 뜻대로 되지 않고 있다. 중국은 협공당하고 있으며 공산 중국은 언젠가는 또 다시 분열될 것이다. 그 때가 한반도에게는 호기일 것이다. 러시아도 선거로 대통령을 뽑는데 중국만 국민선거를 통하지 않고 통치자를 결정한다. 이런 역사적으로 모순된 체제가 영구하다고 볼 수는 없다.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잘 살게 되면 주권재민의 욕구는 커질 수 밖에 없고 국민선거에 대한 요구는 중국에서도 대세가 될 것이다. 공산당 유일체제는 영원하지 않다. 하나의 중국정책은 중국 공산당이 신주처럼 모시는 정책이나 그만큼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으로 언젠가 반드시 중국은 분열된다. 소련연방이 러시아로 축소된 것과 같은 일이 중국에서도 일어날 것이다.

미국의 힘을 빌려 반도의 남쪽은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북은 소련의 힘으로 공산정권이 수립되었다. 공짜로 나라를 되찾았으나 공짜의 댓가는 남북분단과 또 한번의 한반도에서의 대륙-해양세력간의 국제전인 6.25 동족상잔이었다. 오늘 날에도 미국이 없다면 영토에 대한 야심이 있어 온 일본이 반도의 남쪽에 다시 들어 올 것이다. 대륙중국세력을 막아 준다는 핑계로 말이다. 이 때는 차라리 중국의 속국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는 것을 고려해야 할 형편이 될 것이다. 삼척동자를 빼고는 구한말까지 한반도가 중국의 속국이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양세력의 어느 쪽도 한반도가 상대 진영에 독점적으로 지배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미국은 한반도 영토에 대한 야심이 없고 한국내 미군기지를 통한 중국견제가 일차 목표이고 일본을 지키기 위한 전초기지로서 남한반도가 필요할 뿐이다. 그러나 북부여계의 일본은 그렇지 않아서 한반도를 자기들의 고토라고 보고 있다. 한반도 영토에 대한 야심이 있는 일본을 막는 방법은 과거에는 중국을 사대하는 방법이 있었고 현재는 미국이 있어 가능하였다. 중국의 속국이 되지 않고 일본에 먹히지 않는 방법은 미국 밖에 없다는 것은 고종도 알고 이승만도 알았으며 현재도 유효한 신의 한 수이다.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라고 시진핑은 트럼프에게 속내를 비추었다. 지금도 미국이 들어 오지 않았다면 그 말이 유효할 것이다. 미국이 중국의 역사적 권리를 침해하였다는 것이다. 중국이 한 때 약하여 일본에게 한반도 권리를 빼앗겼고 미국이 일본을 대신하여 남한반도에 들어 온 것은 남의 탓이 아니고 중국 자신의 탓이었는데 중국이 다시 힘이 세졌으니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인데 미국, 일본, 한국이 가만히 있을까?

북한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중국의 속국으로서 중국의 울타리와 변견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그 댓가를 받아 연명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북한마저 미국에게 넘어가는 것을 중국은 좌시하지 않는다. 신의주에서 북경은 너무 가깝기 때문이다. 한국이 중국과 너무 가까이 가면 미국과 일본이 그냥 놔둘까? 미국은 한국안보를 흔들것이다. 중국을 배반하면 중국은 한국 무역을 흔들 것이다. 두 마리의 사자 사이에 어떻게 살아 남으면서 어떻게 부국강병을 유지할 것인가? 중국이 당나라, 원나라시절과 같이 세계패권국이 된다면 중국에 붙어야 하지만 지금은 미국과 같은 해양패권국이 세계패권국이므로 지역골목대장인 중국사이에서 곡예를 해야 할 형편이 되었다.

다이오 군도의 일본영유화에 대한 중국의 경제보복을 일본은 잘 견디어 내며 2년내에 극복하였다. 더 이상 중국은 일본에게 경제보복 카드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한국 때리기는 더욱 노골화하고 있는데 일본처럼 맷집을 가지고 견딜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만약 이겨낸다면 더 이상 중국은 한국 길드리기에 경제보복 카드를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군사과학기술의 발달로 백령도나 휴전선에서도 중국이 훤히 보이게 되었다. 이런 곳에 샤드 등의 레이다는 중국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무력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중국은 아프다. 적의 창은 무력화시키고 아측의 창은 적을 찌를 수 있다면 그 보다 좋은 전략이 있겟는가. 중국 코 앞에 해양세력인 미국세력은 북핵을 핑계로 신의 한 수가 두었다.

북한은 중국과 한국이 서로 싸우도록 하는 것이 전력적 목표이다. 북한이 핵을 개발하는 것도 한국이 미국의 샤드를 들여 놓게 유도함으로서 중국을 자극하여 중국과 한국이 서로 싸우도록 만드는 어부지리책략이요 이간책이다. 중국과도 친하고 미국과도 친한 것이 한국에게는 가장 좋고 북한에게는 가장 좋지 않다. 그래서 북한은 중국과 한국 사이라도 이간하려 하는 것이다. 동북아 장기판은 강대국들간에 고차 방정식의 장군멍군하고 있으나 한국은 여전히 졸이다. 한 칸만 앞으로는 나가서 소모적으로 전사할 수 밖에 없고 뒤로는 못가는 졸이다.

북핵은 한국에 샤드가 들어오게 하고 중국은 샤드에 위협을 느끼며 한국에게 무역보복을 한다. 한국은 장사에서 손해를 보고 중국은 국방에서 손해를 본다. 이익은 미국이 본다. 미국은 샤드로 중국을 훤하게 들여다 보게 되었다. 중국의 창은 무력화되기 일보 직전이다. 북한 핵은 이와같이 역설적이게도 미국에게 이익이다. 북한도 장사에서 손해를 보지만 중국과 한국을 이간시키기 위하여 고육책을 쓰고 있다. 북한이 공격당하면 중국과 미국이 싸울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핵을 개발하고 잇으며 서울을 핵으로 인질로 삼아 미국의 북핵에 대한 폭격을 막고 있다. 클린턴 미국 정부는 북핵관련시설을 실제로 폭격하려고 하였으나 김영삼 한국 정부가 말리는 통에 하지 못한 전력이 있다. 미국이 북한을 때리려하면 역설적으로 북핵의 인질이 된 한국정부가 오히려 말린다. 북한은 서울의 핵 인질화에 어느정도 성공한 것이다. 샤드를 아무리 많이 가져 오더라도 핵인질을 벗어 나기 어렵고 핵은 핵으로만이 상대할 수 있으나 미국이 허락치 않는다. 결국 미국에 대한 의존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핵은 핵으로 공포의 균형을 이룰 때만이 평화가 보장된다. 북핵은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정당화시켜주므로 일본도 속으로는 좋아 한다. 한미일 연합을 촉진하므로 미국도 속으로는 좋아한다. 불리한 측은 중국과 한국이다.

따라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은 한반도를 중앙에서 갈라 대치중이며 이 힘의 균형은 70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깨지지 않고 서로 으르렁대고 있고 애궂은 한민족이 아무 댓가도 받지 못하고 그 희생은 다 치르고 있다. 싸움은 우리끼리 시켜놓고 대국들은 자기들끼리 무역하기에 바쁘다. 남과 북이 각각 양세력의 변견만 되지 말고 양세력의
무역과 관광의 장이 되게 할 수 있는 신의 한 수는? 어렵지만 그것을 찾아서 실행하는 자가 현대판 한국의 영웅이 될 것이다. 단, 부자가 되어 먹을 것이 많은 소국은 대국들이 그냥 놔두지 않는다는 위험은 감수하여야 한다.

미국에게 한국은 일본을 지키는 울타리 정도에 불과하다. 일본은 미국에 절대로 필요하고 한국은 곁다리 졸로 필요할 뿐이다. 중국 코 앞에 위치한 침몰하지 않는 미국의 거대 항공모함 역할이 한국의 역할이라면 믿지 않겠지만 세계경영을 하는 미국에게는 그러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부 한국인들은 미국에 대한 짝사랑을 길거리에서 노골적으로 표시하나? 차라리 일본에게 댓가나 충분히 받아내라. 6.25때도 미군이 참전하여 한국을 구원한 것은 일본을 지키기 위한 필사의 노력의 일환이었고 중국 앞에 침몰하지 않는 거대 항공모함의 땅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중국세력과 일본이 대치한다면 일본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제전력상으로는 북한은 중국의 울타리요, 한국은 일본의 울타리일뿐이다. 각자 그 댓가나 충분히 받아 먹는 지도 의심이다.

지진과 태풍이 없는 아름다운 한강의 땅에 대한 일본인들의 야심을 경계하여야 하며 그 방법은 미국세력밖에 없고 미국도 중국견제를 위하여 한강의 서울은 너무나 유용하다. 중국은 고래로 한반도 속국화에 대한 야심이 있어 왔다. 미국이 한반도에 들어 옴으로서 중국의 그런 야심은 더 이상 성취될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이 있어 무력으로는 한반도 속국화 야심을 이룰 수 없으나 무역보복으로 골목대장의 힘이라도 과시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 골목대장식의 힘자랑은 일본에게는 먹히지 않는 수법이었다.

샤드 하나 때문에 한국을 완전히 적으로 돌린다면 중국도 이로울 게 없다. 이제는 한국이 중국의 속국도 아니고 외교권을 가지고 있는데 중국뜻대로만 될까? 북한도 중국 말을 듣지 않고 핵개발을 하고 있는데 한국만 꼭 중국 말을 들을까? 이래저래 중국은 체면을 구겼으나 화를 좀 내다가 참을 수밖에 없으나 한국은 일시적이라도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그래도 안보가 더 중요하다. 버틸 수 있는 맷집이 있는 지가 관건이다. 한반도는 유사이래로 중국 등치에 대한 공포심이 있어왔다. 그래서 속국적인 상태로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100년 동안은 또 하나의 미국이라는 대형이 바다 건너 왔으니 한국은 중국말을 다 들어 주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최근 100여년 동안 세계는 더 큰 등치인 미국이 지배하는 팍스 아메리카의 시대로서 한국은 중국 등치에 대한 공포를 잊고 살 수 있었다. 중국이 등치를 키워 다가오니 이제는 중국 등치에 대한 두려움이 다가오고 있으나 현재도 미국 등치가 더 쎄고 이런 미국이 여전히 한국을 보호하고 있다. 중국이 미국과 한 판 붙을려면 앞으로 10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현재로서는 그 만큼 격차가 크다. 시간을 벌기 위하여 중국은 미국에게 화해의 제스쳐를 쓰고 있으나 중국이 미국에게 화난 표정을 지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양 대국 사이에 제 2의 태평양 전쟁은 불가피하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핵전략무기의 공포의 균형으로 대대적인 태평양전쟁은 앞으로도 일어날 수가 없을 것이나 국지적인 군함의 충돌이나 전투기의 충돌은 일어 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 소규모 충돌에서 중국은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미국과 일본이라는 두 마리의 사자와 중국이라는 한 마리의 사자가 싸울 때 어느 편이 이길까? 거기에 한국이라는 표범마저 미국 편이라면 승자는 정해진 것이 아닌가? 러시아도 꼭 중국편은 아니고 오히려 잠재적인 적으로 보는 게 맞다. 현재로서는 중국에게 모든 게 불리한 게임이다. 그래서 중국이라는 사자는 한국이라는 표범이라도 못 살게 굴면서 마이너 리그인 골목대장의 힘이라도 과시하고 자 하는 것이다. 한국은 최소한 일시적으로 경제에서 타격을 받을 것이다. 버틸 맷집이 있다면 다시는 경제적 제제 카드를 중국은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군주민수라 하여 백성이라는 물은
지도자라는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집어 버리기도 한다. 지도자는 백성을 가장 두려워하고 근신하고 백성을 위해서 최선을 다 해야 한다. 나라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고 백성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정관의 치라고 칭송받는 당 태종은 자신을 보는 3개의 거울을 말하였다.
청동거울은 의관을 잘 차려 입었는지는 보여주고 역사라는 거울은 나라의 흥망성쇠를 바라 볼 수 있게 해주고 직언하는 명신은 나의 판단력이 제대로 작동하는 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직언하는 위징이라는 명신이 있어 정관의 치는 가능하였다.

위징은 말하였다. 자기만 돋보이게 하는 신하는 명신이 아니고 자신은 돋보이게 하지 않으면서 지도자를 돋보이게 하는 자가 명신이다. 간신이 가장 나쁘고 후대에 충신으로 기록되기를 바라는 자도 그리 좋을 게 없다. 명신이 필요한 것이다. 명신은 자신을 낮추고 돋보일려고 하지 않으며 어렵고 남들이 하기 싫은 일을 맡아서 하며 지도자를 올바르게 인도하여 돋보이게 하고 나라를 부국강병하게 만든다.. 진광불휘라 하여 진짜는 스스로를 밝게 하지 않는다. 진광은 스스로를 숨긴다. 공은 타인에게 돌리고 책임은 본인에게 묻는다. 군주나 개인에게나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 싶은 충신보다는 명신이 필요하다. 봉건시대의 맹자도 군주가 못나면 역성혁명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짐이 곧 국가이며 법이라는 초월적인 사고방식의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사람으로부터 국민들은 주권을 다시 찾아 회수하는 법이다. 초헌법적인 행동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며 한국의 정치는 진일보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선의로 행해진 초법이라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몰라서 그랬다, 혹은 선의로 그랬다는 것은 더 이상 변명의 구실이 될 수 없고 오직 법의 잦대로만 평가되고 단죄되어야 한다는 선례를 남김으로서 한국 정치사의 큰 발전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2017년 만들어지게 되었다. 악군을 계기로 역사는 더 발전하게 되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한국 정치사에서 정치인이 죽기도 하고 탄핵도 되기도 하고 하야도 하였던 역동적인 한국역사에서 더 이상 초법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선례가 마련됨으로서 최소한의 진일보의 계기는 마련되었다. 역동적인 한국에서 권력의 야만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을 것이다. 상대를 좌파나 우파로 몰아 세우기만 하면 자기측은 모든 행동이 정당화된다는 단순하고 위험한 논리는 더 이상 발 붙일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백가쟁명은 민주주의에 매우 좋은 일이다. 죽은 권력은 죽일 놈이 되고 산 권력은 모든 것이 옳다는 천박한 민주주의에서 백년대계의 국가경영은 불가하다. 4대강 보 사업은 가뭄과 홍수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나 녹조 등의 환경적인 문제도 만들었다. 양가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다. 특히 공주보는 가뭄이 극심한 충남지역의 농사물을 대는 데 큰 기여를 하였는데 녹조가 무서워 상시개방하면 그 아까운 물을 그냥 다 흘러보내게 된다. 녹조로 농민들이 다 죽지는 않지만 가뭄으로 물을 대지 못하면 농민들은 굶어 죽을 판이다. 아무리 나쁜 것도 100% 나쁘지만은 않고 아무리 좋은 것도 100% 좋지만은 않은 법이다.

백강전투이후 일본과 중국은 유사이래 동양에서 항상 적대 관계였다. 중국과 싸울 수 있는 천손사상을 가지고 북방기마민족의 전통이 일본으로 갔기 때문이다. 만주 북부여계가 한반도를 거쳐 왜 열도로 갔음으로 만주와 한반도를 일본의 고토로 보고 일본은 계속 침략하여왔다. 미국의 원자탄에 졌을 뿐이지 중국에게는 지지 않았다 고 일본인들은 생각하고 있다. 북방의 북부여계와 한족과의 싸움은 오늘날도 지속되고 있다.

미국은 일제가 강할 때는 중국편이었고 한국은 졸이었으며 중국이 강하게되니 미국은 일본편이 되고 한국은 역시 졸이 되었다. 졸은 앞으로만 가야 하는 운명으로 항상 싸움의 앞에 서서 죽는 소모품일 뿐이다. 한국은 언제든지 미국에게 유용한 장기판의 졸이고 중국과 일본은 상황에 따라 미국 자기편이기도 하고 적이기도 하였다.

일본에게는 米國이고 한국에게는 美國이다. 한국은 미국을 일제로부터 해방시켜준 아름다운 선한 나라로 보지만 일본은 미국을 쌀이 많이 나는 부자의 나라로 본다. 미국에게 적이 되는 것이 현재로서는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일이다. 리비아의 카다피가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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