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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생이 아닌 의사로서 육백년 역사 고찰
2017-08-02
일제와 싸운 당사자인 미국이 한반도 전체에 대한 권리를 가져야 당연한데 소련이 새치기를 하며 끼어 들어서 북을 일방적으로 점령함으로서 남북분단은 초래되었다. 미국과 일제가 태평양전쟁으로 싸울 때 소련은 눈치만 보면서 관망하다가 원자탄이 투하되자마자 재빨리 죽은 시체나 마찬가지인 일제에 선전포고를 하며 북한과 만주를 새치기 점령하였다.

김일성의 소련군 예하의 300명 소부대는 이때에 선봉으로도 내려오지도 못하고 한 달이 지나서야 소련군의 허락하에 개별적으로 북한에 내려왔다. 이성계는 자신의 역량과 자신의 힘으로 조선을 건국하였으나 김일성은 300명도 안되는 소부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소련군의 힘에 의하여 북한이 점령되니 스탈린에 의하여 북의 수상으로 간택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김일성은 거의 꽁짜로 북한을 얻었다. 이승만도 남한을 꽁차로 차지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로 인하여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최전선으로 한반도가 분단되고 패전국 일본열도는 분단을 면하면서 오늘날 다시 부흥하엿다.

한반도가 한일합방으로 일본의 땅이 되었을 때는 일본이 중국과 대등하거나 우월하게 싸울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게 두려운 중국은 백강전투와 임진왜란에 개입할 수 밖에 없었다. 해양세력에 대한 울타리와 방패로서 북한을 인식하는 중국은 또 다시 6.25전쟁에 개입하여 한반도 분단을 고착화하였다. 적어도 남에게는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쌍방에게 똑 같이 중요한 한반도를 나누어서 각자의 영향력하에 두는 것으로 국제정치는 타협하였으니 남북분단은 수 백 년이 가도 깨어지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에게는 미국과 중국이 다 같이 중요해졌다. 한국이 일방적으로 미국, 일본의 편으로 치우치는 것도 중국에게는 매우 불편한 일이기에 한국을 중간지대에 잡아두려고 한다.

한반도에서 백제라는 친일 형제 국가가 있을 때는 일본열도는 적어도 중국이라는 대륙세력으로부터 안전하였다. 백제가 망하면서 방패를 잃은 일본은 수세에 들어 가고 섬나라 근성의 배타성으로 뭉치지 않고는 독립적으로 생존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차지하려고 대한해협을 넘어왔고 한반도는 유린되었다. 모텍동과 장개석이 한참 내전 중이었기 때문에 일제가 물러 난 한반도에 중국은 바로 들어 올 겨를이 없었고 일제를 물리 친 미국이 한반도전체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히 생각되었으나 소련이 북한땅을 재빨리 새치기 하였고 남북분단은 결정되었다.

6.25전쟁에 중공군이 참전함으로서 중국은 북한에 일정한 지분을 가지게 되었다. 일제보다 더 강력한 해양국가인 미국이 남한에 들어 옴으로서 중국은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잃었다가 국교가 회복되며 어느정도는 관계가 회복되었다. 중국의 입장에서 한국을 다시 완전히 버리기에는 한국이 너무 가치가 있고 전략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중국이 가진 카드는 많지 않다. 한국에게 중국이 중요하듯이 중국에게도 한국은 중요하다. 미국과 일본과 한국의 연합은 중국에게는 가장 강력한 위협이다. 그런데 한국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겠는가?

대륙세력 여몽 연합군이(원나라 + 고려)가 일본열도를 점령하기 위하여 쳐들어 왔으나 마침 태풍(신풍=가미가제)이 도와주어 간신히 물리친 사실에 근거하여 적어도 한반도의 남쪽 반만이라도 방패로서 자신들의 영향력하에 두려고 한다. 일본을 대신하여 미국이 한국땅에 들어 오지 않았다면 힘의 진공 상태인 한반도는 중국과 소련의 속국 형태로 다시 돌아갔을 것이고 그들의 종노릇을 하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한국만이라도 대륙세력으로부터 해방이 되었고 세계 패권국 미국의 보호하에 세계 20위 이내의 선진국이 되었다. 사람들은 일제로부터 해방은 잘 알면서 대륙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은 잘 모른다. 대륙세력으로부터 해방이 오늘 날 번영을 가져왔다. 그러나 대륙을 완전히 버리고는 한국은 번영할 수가 없다. 따라서 대륙도 중용하고 미국, 일본 등의 해양세력도 한국에게는 중요하다.

중국의 완전속국으로 들어 가게 된 결정적 원인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조선의 개국이었다. 북진정책의 고구려와 고려를 부정하고 조선을 개국하면서부터 민족의 무대는 압록강 이남의 한반도에 다시 갇히게 되었다. 그나마 두만강-백두산을 경계로 함경도라도 조선의 영토에 포함시킨 것은 이성계의 고향이 함흥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일제시대까지도 함경도에는 여진족의 마을이 존재하였다. 조선개국이후 600년의 역사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각각 쓸고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중국세력만이 한반도에 위협세력이었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력이었다.

화약의 개발과 보급은 전쟁에서 말의 중요성을 떨어트렸다. 몽고족에게 한족들은 4등 국민으로 푸대접받으며 100년간 철저히 탄압되었다가 각지에서 난이 일어나며 화약 포대로 무장한 주원장을 중심으로 뭉치면서 몽고족의 원나라는 망조가 들기 시작하였다. 말보다는 화약 화포가 더 중요한 시대가 온 것이다. 세계국가가 되었던 원나라는 100년간 유라시아대륙을 지배하였지만 주원장이라는 한족의 영웅에게 밀리기 시작하며 북쪽 몽고로 달아나 북원으로 쪼그라들었다. 그게 오늘날의 인구 300만의 소국 몽고국의 형태로 남았다. 요동은 원나라 귀족인 나하추가 독립적으로 지배하며 명나라의 요동으로의 진군을 방해하고 있었다.

원나라 지배하에 있던 고려의 공민왕은 이틈을 타서 원나라로부터 일부독립하기 시작하며 일부 친명정책을 펴고 독립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경제력이 없어 배가 고픈 신진사대부들도 성리학에 기반하여 친명 세력이 되며 기득권 경제력을 가진 친원파 훈구귀족들을 공격하였다. 원나라의 은혜를 많이 입으며 배가 부른 특권 고려 훈구 귀족세력들은 기득권력과 기득 경제력을 지키기 위하여 원나라가 완전히 망하지 않고 살아 남기를 바래며 세상이 팍스 명나라로 완전히 변하는 것까지는 원치 않았기에 요동정벌로 명나라를 치는 것을 찬성하였다. 그들이 그린 그림은 명나라와 원나라와 고려의 천하 3국 분할이었다. 고려대국의 원대한 꿈은 이성계의 반란으로 물거품이 되었고 한반도는 중국의 속국화로 고착되었다. 시진핑은 트럼프에게 대 놓고 한반도 전체는 역사적으로 중국의 것이었다고 말하였다. 한국도 자기들의 것이었다고 하면서 미국에게 뺐긴 것이 억울하다는 표현이었다. 일본은 중국의 것이었다고 말하지 못하나 한국도 중국의 것이었고 지금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심정의 표현이다.

친명파 이성계는 요동정벌군을 이끌고 평양을 출발하여 의주에 도달하는 20여일 동안 회군 쿠테타의 기회와 명분을 엿보고 있었다. 최영과 우왕은 너무 많은 군사들을 원정군에 보내놓고 보니 무방비 상태에 스스로 빠지는 우는 범하고 말았다. 최영의 실수를 재빨리 알아채고 회군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이성계는 재빨리 반역을 결정하였다.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는다고 보았다. 박정희의 쿠테타도 일종의 회군이었다. 적을 막으라는 군대를 서울의 정권으로 방향을 돌려서 정권을 탈취하였으니 이성계의 회군과 성질이 똑 같다.

쿠테타 성공 후에 훈구 귀족들에게서 뺏은 땅을 과전법이라 하여 평민들에게 나누어 주며 인심을 얻고 세상의 판을 바꾸며 조선 개국을 착착 준비하여가며 4년만에 조선을 개국하엿다. 김일성도 지주에게서 뺏은 땅을 나누어주는 형태를 취하면서 인심을 얻으려고 하였던 것과 비슷하다. 전통적인 상국인 원나라가 망조에 들지 않았다면 고려도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신흥 대국인 명나라를 재빨리 상국으로 모셨다면 고려는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최영은 위험천만하게도 독자적으로 신흥 대국인 명나라를 치는 요동정벌에 나섬으로서 친명파 장수인 이성계에게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하고 말았다. 천하 3분지계에 눈이 어두워 독립 대국파 최영은 순진하였고
치졸한 이성계는 악랄하였다.

망명하여 대대로 100년간 원나라 쌍용총독부의 원나라 관리였던 이성계 가문도 원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서 함흥의 원나라 쌍용총독부를 무너트려 자신들이 차지하며 자동적으로 친명세력이 되었다. 홍건적과 왜구 등을 무찌르며 성장한 최영 등의 신흥무장세력은 훈구 귀족세력을 누르고 우왕을 세우며 고려를 강력한 무장독립국가로 만들고 자 하였다. 이 때는 이성계도 최영을 도와 최영 정권을 세우는 데 일조하였으나 어디까지나 친명파로서 명까지 치는 것은 반대하며 암암리에 판을 엎어 버릴 기회를 보고 있었다. 국제정세를 보는 눈과 전략가적인 능력은 용장인 최영보다 간계의 지장인 이성계가 앞섰다.
이성계는 조조와 같은 점이 많았다.

명나라는 북원으로 쪼그라진 몽고세력을 추격 섬멸하며 힘이 더 커지니 이미 고려땅으로 편입된 철령이북지역에 철령위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겠다고 우왕과 최영의 고려를 압박하였다. 고려는 역으로 요동의 명을 치기로 결정하였다.

고려는 공민왕때 이미 3차례나 요동을 공격하여 외교국방적으로 어느정도 효과를 본 적이 있었기에 최영의 요동정벌계획은 하나의 카드로서 매우 유용한 것이었다. 발해-금의 후예인 여진의 군사 2만과 압록강 건너에서 만나서 연합군을 형성하여 명나라를 치기로 밀약이 되어 있엇고 북원의 1만의 병사도 연합군으로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고려 5만이 합치면 8만의 대군이었다. 주원장의 군대도 당시에 15만에 불과하였다. 최영이 직접 군사령관을 맡아 선봉에 섰다면 쿠테타가 불가능하였을 것이나 최영은 서경에 남았고 군대는 이성계의 수중에 온전히 들어갔다.

이성계의 5대조(전주 이씨)는 고려조의 전주부사와 사이가 좋지 않게 되어 동쪽으로 도망을 가서 첩첩산중인 삼척에 숨어 살다가 계속 쫓기매 더 이상 고려땅에서 살지 못하고 고려조정에 원한을 가지며 동해안을 따라 당시 원나라 지배의 쌍용총독부령인 함흥으로 망명을 가서 원나라 관리로 정착하였고 부친인 이자춘까지 대대로 원나라 관리를 하며 동북면의 실력자로 성장하엿다.

함흥, 경원 등에서 5대 동안을 거치면서 함경도의 토박이가 된 이성계의 피속에는 여진족의 피도 섞였고 몽고족의 피도 일부 섞였다. 일종의 혼혈이었고 함경도 여진족들도 이성계를 후원하였다. 실제로 이성계의 고모도 여진족 족장에게 시집을 갔다. 회군 군사들이 개성을 포위할 때 함흥에서 개성으로 급히 온 여진족 군사 1000명도 새롭게 쿠테타군에 가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종때 지은 용비어천가에서 5대조들을 미화하여 이성계의 조선왕조개국을 억지로 정당화하고 자 하였으나 사실은 100년간 쌍용총독부 원나라 관리로 부역하며 원나라에 충성한 사람들로서 애초부터 고려조정에 원한이 있었다. 이성계는 이자춘의 큰 아들이 아니나 뛰어 난 무술과 무공으로 후계자가 되었다.

원의 세력이 쇠퇴한 틈을 타서 원의 쌍용총독부를 무너트리고 이자춘과 이성계는 함흥일대(동북면)을 독자적으로 지배하다가 그 세력의 사병을 가지고 고려로 귀의하엿으나 여전히 독자적인 동북면의 경제력과 사병을 가지고 있었다. 이성계의 모든 힘은 여기에서 나왔다. 이자춘, 이성계 세력은 원나라를 배반하고 무찌르며 고려에 귀의하면서 원나라와는 불구대천이 되었고 자동적으로 친명세력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성리학에 기반한 신진사대부들도 친명세력이었기에 이 두 세력은 연합하여 기득권 친원파 훈구귀족세력을 공격하였다.

당시 남해안과 남부지역에 왜구들이 활개를 치고 있엇는데 이성계는 황산대첩으로 왜구를 섬멸하며 명장으로 성장하였다. 귀족세력 이인임 정권을 제압하며 최영의 무장 정권이 들어 서는데 이성계 세력도 협조하였기에 최영은 이성계를 어느 정도는 신임하엿으나 장차의 경쟁자로 보아 명나라에 찍히도록 요동정벌에 앞세웠다. 일종의 이이제이 였으나 이성계는 이를 알아차렸다. 친명파 이성계의 역심은 여기서부터 싹트기 시작하였고 군사들도 소모품이 되는 니 차라리 이성계를 따라 정권을 세우는 데 일조하여 보상을 받고 싶었다. 이성계는 군사들의 이러한 심리를 읽고 선동하여 마침내 회군의 쿠테타를 감행한다.

원나라로부터 어느 정도는 독립하여 일부 친명정책을 펴던 공민왕이 친원파에게 암살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졋다. 이어서 정권을 잡은 우왕과 최영은 기득권 귀족 훈구파를 억압하였으나 공민왕처럼 친명정책을 취하지 않고 고려 독자적인 북방정책을 취하게 되고 명나라와 긴장 상태에 들어간다. 명나라는 요동 나하추의 투항 후에 북원도 공격하여 섬멸하며 더이상 고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 지게 되자, 자주독립무장파인 우왕과 최영의 고려에 위압적인 자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과거 원나라 지배의 쌍용총독부자리에 명의 철령위을 설치하여 고려로부터 다시 뺏고 자 하였다.

이에 분개한 우왕과 최영은 역으로 요동을 치는 위험천만한 결정을 하여 정치군사적으로 명나라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당나라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결국은 고구려가 망하게 되는 과거가 연상되는 사태였다. 몇 개의 성을 뺏을 수는 있으나 요동을 계속적으로 차지하기는 어렵다고 하며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반대하엿다. 최일선부대가 회군하여 정권을 차지하는 예는 고래로 흔한 일이었다. 김유신의 최전방군대의 회군과 김춘추의 연합으로 그들이 신라 정권을 잡았었고 왕건의 궁예에 대한 쿠테타로 고려 왕씨정권이 생겼으며 박정희군대의 서울로의 회군이 30년 군사정권을 만들었다.
이성계에게 속아 회군을 대비하지 못한 최영은 고려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고 고려에 대한 만고의 역적인 셈이다.

친명파 신진유교파와 이성계는 처음에는 요동정벌을 반대하엿으나 1인자 최영이 요동정벌을 밀어 붙이자 원정군의 총사령관이 되게 해달라고 최영에게 울면서 간청하며 기억코 요동을 정벌하겠다고 충성을 맹세하엿으니 흑심을 숨기고 있었다. 완전히 믿지 못한 최영은 이성계를 원정군의 2인자격인 우군 통제사로 임명하였으나 주력군은 동북면 출신의 이성계의 사납고 정예화된 사병들이었다. 원정군의 1인자격인 좌군 통제사는 조민수였으나 이성계의 눈치만 살피다가 회군에 합류하였고 쿠테타 성공 후 이성계에게 토사구팽되어 소모품이 되었다.

최영과 우왕은 서경에서 지휘를 하고 있었다. 최영의 패착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 빈틈을 이성계는 놓치지 않았다. 최영은 자기 책임하에 원정군을 이끌고 요동에 갔었어야 했으나 위험과 책임은 회피하고 권력만 누리려고 서경에 남았고 그 댓가는 이성계의 반란이었다.

5만의 원정군은 평양을 출발하여 20일만에 위화도에 도착하엿다. 원정군의 군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본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며 마음이 변하게 되고 마침 홍수가 져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자 이성계는 10일동안 4대 불가론을 들어 평양에 잇는 우왕과 최영에게 회군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엿으나 이것은 요식행위일뿐 이미 항명하겠다는 것으로서 최영으로서는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요청이엇고 어차피 회군은 정해 진 것으로 이성계를 믿은 것에 대한 큰 후회를 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위화도에서 10일만에 왕명과 최영을 거스르고 이성계의 회군은 시작되었고 우왕과 최영은 서경으로부터 급히 개경으로 내려가 군사를 모아보았으나 왜구를 막으려 이미 남해안에 보낸 군사를 빼고 보니 개경에는 1만이 안 되는 군사가 있을 뿐이었다.

5만의 회군세력은 위화도로부터 400KM의 거리를 단 10일만에 주파하여 우왕과 최영이 미처 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개경을 포위하였으므로 강화도나 남쪽으로 피난을 가지 못한다. 5만과 1만의 싸움은 이미 결정이 낫고 이성계는 군권과 정권을 한 손에 쥐고 4년간 고려조정을 농락하다가 마침내 친명사대의 조선을 개국하엿다. 애초부터 친명파인 신진사대부들은 친명파 이성계와 죽이 잘 맞아 기득권 훈구파인 친원파 세력을 제거하여갔다. 정몽주는 신진사대부 출신으로 친명정책인 회군을 지지하여 이성계와 통하고 있었다. 다만 역성혁명까지는 의견이 달랐다. 같은 고려 문과에 급제한 이방원은 하여가로 속뜻을 떠본 후에 이성계의 허락없이 선죽교에서 그를 살해하엿다. 이로서 이방원은 조선개국에 일정 지분을 가지게 되었으나 이성계에게 밉게 보이게 된다.

군사전문가인 이성계는 명나라가 북원을 섬멸하는 것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채며 명나라 편에 서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예측하는 국제정세 능력이 출중하였고 최영이 서경에 남아서 지휘를 하매 원정군이 이성계의 수중으로 들어 오게 된 단 한 번의 찬스를 놓치지 않는 기회주의적 승부사의 기질이 있었다. 약해진 주인을 치는 데는 이자춘도 마찬가지로 약해진 원의 쌍용총독부를 쳐서 자신들이 차지하는 기회주의의 대가 집안이었다. 이성계 집안은 원래부터 고려조정에 원한을 가지고 원나라땅이었던 함흥의 쌍용총독부에 망명하였기에 고려에 대한 충성심이 애초부터 없었다.

남부지역의 왜구를 막기 위하여 개경의 남은 병사들도 남부지방으로 다 내려가 군사적으로 개경이 텅빈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엇다. 최영은 군내 친명파인 이성계의 반란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평양에 머물러 지휘를 하려는 것이 결정적인 화근이 되었다.

이성계의 회군으로 도전자가 없어 진 명나라는 일취월장의 대국으로 성장하였기에 이성계는 명나라의 일등공신이 되었고 그 댓가로 함경도(철령이북)를 포함한 조선을 개국하게 되었다. 이성계의 회군으로 동북아의 국제정세가 결정되어 버렸고 팍스 명나라하에 200년간 제후국 조선은 평화를 누렸다가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히데요시가 팍스-명나라를 부정하며 정명가도라 하여 한반도를 전면적으로 침입하였다.

압록강 국경이 위협받으니 상국 명나라는 한반도에 참전하였고 일본왜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냇으나 또 다른 도전세력인 만주 여진족에게 어버이의 나라 명나라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남쪽의 왜를 겨우 막고 보니 북쪽의 도전세력인 만주 여진족의 청나라에게 명나라는 쉽게 무너진 것이다. 연속적인 원투 펀치에 조선의 어버이의 나라 명나라가 무너진 것이다.

여진족의 나라 청나라에 의한 팍스 청나라의 보호로 조선은 또 다시 300년간 평화를 누렸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정권은 대륙의 힘을 느끼고 300년간 조선을 침략하지 못했다. 1860년 미국의 흑선에 일본은 적극 개방하여 메이지유신으로 막부정권이 문을 닫고 천왕중심으로 근대화가 급속히 진행되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동북아의 패권국가로 부상하였다. 구한말에 청나라가 약화되어 조선을 보호하지 못하게 되며 일본은 상국없는 조선을 쉽게 먹었다. 구한말의 노론기득권세력은 그대로 일본의 작위 귀족으로 편입되어 계속 권과 부를 누렸고 중인출신들이 지도층으로 부상하였으며 평민과 천민들에게도 신분의 해방이 있었고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니 누구도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하여 저항을 무력화하였다. 일부 정치적 야심이 있는 사람들은 만주나 중국땅에서 독립운동을 하였으나 극히 소수였고 미약하였다.

고려-만주발해여진(금나라)-북원의 연합으로 요동을 쳤다면 명나라는 중화를 통일하지 못하였을 것이고 고려는 북조의 중심국가로 황제국이 되었을 것이다. 이성계의 회군에 실망한 발해-여진의 군사 2만은 후금을 세워 세력을 키우다가 200년 후 마침내 명나라를 멸하고 청나라를 세워 중국대륙을 지배하게 된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불가하다는 이성계의 궁색한 4대 불가론을 250년이 지나 여진족 청태조 누르하치는 명을 멸망시킴으로서 철저히 부정하엿다. 어버이의 나라 명나라의 멸망은 조선에 큰 충격을 주었다. 만주 여진족은 사실상 북부여-고구려-발해족으로 우리 민족의 일파이다.

몽고족은 흉노족의 후예이고 여진족은 북부여-고구려-발해족의 후예이며 거란족은 그 사이에 끼여 있는 고조선의 후예이다. 금와(금개구리)왕이 북부여 왕이었고 그 후예들이 발해와 금나라를 세웠다. 고구려 시조 주몽도 한때 금와왕의 밑에 있었다. 발해가 거란(요나라)족에게 일시적으로 망했으나 바로 금나라로 일어섰다. 13세기에 흉노족의 후예인 몽고족의 징기스칸이 우선 만주의 거란과 금나라를 흡수통일한 후에 북쪽을 평정하고 북경을 포위하여 한족 30만명을 몰살하며 중국대륙을 차지하였고 100년간을 동유럽까지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하였으나 오랑케는 100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설을 만들었다.

몽고의 부흥에 고려는 잠시 저항하였으나 굴복하고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어 한족보다는 대우를 받았다. 원나라는 고려-몽고 연합으로 일본도 침략하였으나 신풍이 불며 실패하였다. 방어에 자신이 붙은 왜구들이 고려말에 남부해안지방을 임진왜란때보다 더 자주 침략하며 유린하였다. 이성계군은 황산대첩으로 남부지역의 왜구들을 섬멸하며 고려세상에 그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00년간 몽고족에 멸시받던 한족들은 주원장을 중심으로 명나라를 세우고 원 황제를 몽고 북원으로 쫓아냇다. 팍스-명나라를 예상하고 이성계는 명나라에 붙기로 하여 회군을 감행하였다. 명나라의 허락으로 마침내 제후국 조선을 개국하게 된다.

4대 불가론은 핑계거리엿을 뿐이며 군사전문가인 이성계는 텅빈 개경에 대한 자신의 쿠테타의 성공 가능성을 매우 높다는 것을 간파하고 속전속결로 개경을 포위하였다. 남해안의 왜구들이 이성계의 쿠테타를 성공케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왜구를 막으려 개경에 남은 군대는 남으로 다 보내놓고 보니 텅빈 개경은 회군세력에게 속수무책이 되엇던 것이다. 일선 군사전문가인 이성계는 이것을 다 알고 잇엇던 것이다. 따라서 이성계의 회군은 99%는 기획된 것이고 홍수 등은 핑계거리였을 뿐이었다. 상국을 치려는 무장 최영의 전략은 너무나 위험한 것이었다. 고구려를 망하게 한 연개소문이 연상되는 최영의 행태였다. 최영이 명나라에 붙었다면 이성계의 쿠테타는 원천적으로 불가한 것이었다.

말만 잘 듣고 있으면 1인자 최영에게 2인자 이성계는 요동정벌 후에 토사구팽을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성계의 입장에서 1인자 최영을 잡을 기회는 단 한 번의 기회인 회군 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기회는 너무 좋았다. 상국을 치려는 무모한 최영에게서 이성계는 전략상 빈틈을 보았다. 이성계는 야심이 큰 사람이었으나 그것을 숨기며 최영을 철저히 속였다.
개경에 남은 군대도 왜구를 막기 위하여 남해안으로 보내 개경을 텅 빈채로 남겨 둔 최영의 무방비는 자동적으로 야심가 이성계의 쿠테타를 불러들였다.

원정을 보낼 때도 수도에는 방비군을 충분히 남기어서 원정군이 회군하여도 승산이 없게 만들어야만 회군의 쿠테타가 발생하지 않는다. 더구나 이성계는 친명파였다. 명나라를 뒤에 업고 쿠테타를 일으킬 가능성이 매우 높았으나 최영은 그 점을 간과하고 이성계에게 철저하게 속았다. 이성계는 전쟁의 군사 동물적인 감각으로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더구나 최영, 우왕에게는 뒤를 봐주는 상국인 원나라가 망하여 갔기 때문에 후견인이 없는 것과 같았고 이성계는 장차의 상국인 명나라의 후견이 음양으로 있엇다. 양측이 싸우면 후견국이 있는 쪽이 이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뛰어 난 장수들은 항상 정권에 위험하기에 유방도 항우를 잡은 다음에 토사구팽 격으로 자신의 일등 공신인 한신장군을 죽였다. 뛰어 난 장군들이 토사구팽을 당하지 않으려고 쿠테타를 물색하는 것은 당연한데도 최영은 방심하고 많은 군대를 친명파 이성계에게 맡긴 게 화근이 되었다. 최영은 무장일뿐 전략가라고 보기 어려웠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 되었다. 설마가 항상 사람을 잡는 법이다. 모든 인간사에서 유비무환만이 답이다. 더구나 개경방비를 위한 군대도 왜구에 대비하기 위하여 남부지방으로 보냈으니 개경은 텅빈 상태가 되었음을 군사전문가인 이성계는 너무 잘 알고 있엇다.

몽고 원나라는 한족들을 4등으로 취급하여 절대적으로 탄압한 반면 색목인(서양인)은 3등, 고려인과 만주 여진족은 2등 국민으로, 한족보다 상대적으로 우대하였다. 이성계의 5대조는 자신들을 학대하는 고려를 버리고 우대하는 원나라 땅인 함흥으로 들어가서 원나라 지방관리로 자리를 잡았다. 즉, 자신들을 학대하는 고려를 떠나서 원나라 쌍용총독부령인 함흥으로 망명을 하여 원나라 관리로 대대로 충성하엿다. 고려가 아닌 원나라의 혜택을 받아 성장한 집안이었다. 원나라가 약해지자 원나라를 배반하고 쌍용총독부를 차지하며 다시 고려로 귀의하여 고려장수가 되었으나 기회가 오자 고려왕조를 친 이성계 가문의 역사는 배반의 배반의 파란만장한 역사로서 조선건국은 우연하게 이루어 진 것은 아니고 5대에 걸쳐 철저한 기회주의적 노림수를 통하여 이루어 진 것으로 용비어천가가 그들의 행적을 미화한 바 있다.

고려장수로 귀의하였다고 하나 이성계는 동북면(함흥)을 독자적으로 지배하며 사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적인 독자 세력을 유지하고 있엇으며 그의 쿠테타는 그에 기반하였다. 함흥은 이성계의 기반이었다. 이방원의 왕자의 난으로 왕위를 뺏긴 이성계는 함흥으로 귀향하여 그 지역을 독자적으로 다스리며 많은 함흥차사를 죽였다.
명나라의 개국공신보다도 더한 공을 세운 이성계의 회군의 댓가는 명황제의 인정하에 함경도를 포함한 제후국 조선의 개국이었고 사대를 댓가로 얻은 200년간의 평화였다.

서경(평양)은 고려의 북진정책의 중심으로 고려 500년 동안 나름 대접을 받았다. 조선 500년 동안 한양 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서북지역 평양세력과 개성세력이 유력하였기에 평양세력을 더욱 더 탄압하여 억눌렀다. 이괄의 난, 홍경래의 난 등으로 평양세력이 한양정권에 도전하였으나 실패하고 실패하며 탄압은 가중되었고 차별은 심해져가니 평양민심은 한양정권으로부터 독립을 원하게 되고 차라리 일제를 제일 환영하였으며 일제몰락후 북한에 진군한 소련은 그것을 이용하여 평양 북조선정권을 재빨리 만들었다.

장개석이 혹시 1945년 8월 이전에 중국을 통일하였다면 황해도 출신인 김구가 장개석의 중국을 배경으로 북한의 주인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북한에 진군한 것은 소련이었고 북중국은 모택동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소련을 배경으로 젊은 소련파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간택되어 북한을 차지하였다. 김일성은 같이 귀국한 자신만의 군대인 300명의 빨치산들의 무력이 있었으므로 반대파를 쉽게 제압할 수 있엇다. 조만식 등은 자신만의 무력이 없었고 소련군의 무력도 배경에 두지 못햇기에 김일성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김일성은 거의 공짜로 북한을 먹었다.

김구는 한반도내에서 의지할 수 있는 절대 지지 지역과 지지 상국을 잃었고 독립운동을 하엿다고 하지만 자신을 보호해 줄만한 귀국동반 무장군대가 없엇다. 남한에 진군한 것은 미군이었고 미국을 배경으로 미국파 이승만의 집권은 필연이었다. 이승만도 신변을 지켜 줄 자신만의 무력이 없었기에 미군의 무력과 친일파들의 경비력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친일파들은 그 틈을 파고 들어 또 다시 권력 중심에 기생할 수 있었다. 특히 본래 노론 출신인 고위급 친일파들은 뛰어 난 생존술로 이승만에 붙어 반공투사로 변신하면서 또 다시 기득권을 이어갔다. 장개석은 대만으로 쫓겨가고 국내외적으로 배경삼을 세력이 없어 진 김구는 홀로 무방비상태로 귀국하여 친일파들과 친미파의 호랑이 입속에서 암살되었다. 유일한 경쟁자가 없어 진 이승만의 천하는 필연적으로 장기 독재로 이어졌다.

함경도는 조선 500년 동안 한양정권에 참여하였기에 한양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고 오늘날도 서울로의 탈북민은 대부분 함경도 출신이다. 함경도는 평양에 속하는니 차라리 한양에 속하는 것을 과거나 지금도 원하고 있다. 고려정권을 잃은 서북지역의 개성과 평양은 조선 한양정권을 싫어 했다. 평양을 기반으로 여러차례 난이 발생했으나 실패하고 실패하여 서북지역의 차별은 심해졌고 한양정권으로부터 소외되었다. 개성인들은 성계만두라하여 이성계를 씹는 만두 이름을 지어 저주하였으며 한양권력에 소외되다보니 개성상인으로 비유되는 상권으로 진출하였다.

함경도는 조선왕조의 성지와도 같아서 500년 동안 어떠한 일이 있어서 지켜냈기에 조선의 영토로 고착되었다. 조선조 초기에는 경상도 차남들을 여진족의 땅인 함경도로 강제 이주시켜 정착시킴으로서 함경도를 조선에 확실히 귀속시켰다. 오늘날 함경도인들은 경상인과 여진족의 혼족이다. 함경도 사투리가 경상도 사투리와 매우 유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선개국의 정통성을 백성들로부터 더욱 인정받기 위한 일환으로 이성계의 손자인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며 태평성대를 열었고 신하들은 용비어천가를 지어 바치었다.

고려 왕씨들을 몰살시키며 고려를 철저히 부정하였던 조선초에 만주를 버리는 대신 함경도라도 확실히 잡아 두려고 하여 조선의 국토로 확정되었다. 왕씨들은 살아 남기 위하여 옥씨나 전씨 등으로 개명하였다. 발해의 일부라도 다시 찾은 것은 그나마 이성계의 고향이어서 가능하였다. 고려는 척박한 함경도보다는 비옥한 만주 요동에 관심이 많았다. 고려가 망한 것은 떠오르는 상국인 명나라에 붙지 않고 도전한 것이 근본원인이고 이성계는 그것을 기회주의적으로 이용하엿을 뿐이다.

위화도 회군의 컴플렉스를 극복하고 자 하여 세종은 피나는 노력을 하엿고 그 결과는 백성을 위한 한글 창제와 문화창달이었지만 명나라에 대해서는 세종 자신이 지극 사대라 하며 더욱 철저히 알아서 모시었다..그나마 민심을 얻으려는 조선초의 초심을 잃고 조선조 후기에는 500년의 부패 기득권세력 형성되어 기득권만 지키려 하며 또 다시 백성들의 원성을 사는 정치를 하게 되고 도처에서 민란이 나며 나라는 허약 부패하게 되니 그 틈을 부패하지 않고 근대화로 강대해진 메이지 유신의 일본이 놓치지 않고 청나라의 보호가 없어 진 한반도를 쉽게 먹었다.

조선 한양 정권에 저항하였던 지역과 계층은 일제를 차라리 환영하였다. 고래로 한반도의 힘만으로는 일본을 막을 수는 없었다. 대륙 상국의 보호가 있어야 한반도 정권은 일본을 막을 수 있엇다. 광개토대왕에게 쫓긴 오진 백제 웅진후왕이 도일하여 세운 왜나라는 300년 동안 적어도 한강이남의 백제땅에게 영향력을 유지해왓으나 신라가 대륙세력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한반도를 차지하니 연이 끊어졌다.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에 수세에 놓인 왜나라 일본은 섬나라 특유의 배타성으로 뭉쳐서 당나라로부터 공격을 피할 수 있엇다. 그러나 고려때도 남해안에 대한 왜구들의 침입은 계속되었고 고려말에는 임진왜란때보다 더욱 극심하였다.

위화도회군으로부터 250년 지나 조총으로 강대해진 왜나라 일본은 임진왜란으로 한반도를 유린하였다가 조선의 상국인 명나라의 참전으로 왜열도로 철수하였으나 그 틈에 강대해진 후금의 만주 여진족은 명나라를 먹으며 청나라를 세웠다. 명나라를 직접적으로 망하게 한 것은 여진족의 후금(청나라)이지만 명나라가 한반도에서 임진왜란의 일본과 싸우느라 여진족의 부흥을 미처 견제하지 못한 것이 간접적인 원인이었다. 일본이 명나라를 반절은 망하게 하고 그 위에 후금(청나라)의 누르하치가 최후 펀치를 날렸다. 한족을 4등 국민으로 천대하던 몽고의 원나라는 한족의 반발로 100년만에 망하였으나 여진족의 청나라는 한족을 적당히 대우하며 300년을 지속하였지만 일본과 서구제국주의에 얻어 맞다가 다시 모텍동의 한족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정체성을 잃어 버리며 한족에게 혼합되어 버렸다.

토요토미의 사망으로 한반도에서 왜군의 철군이 결정되었고 전쟁종료후에 이순신은 온갖 핑계로 선조에게 토사구팽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순신은 선조의 좁은 도량을 너무나 잘 알기에 차라리 노량해전에서 떠나는 왜군을 쳐부시며 최후에 전사하는 선택을 하며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것을 선택하엿고 자손들을 살리고 자신이 충신으로 죽는 것을 선택하였다. 이성계보다 뛰어 난 장군이며 민심을 얻고 있던 이순신은 새로운 나라를 개국하지 않고 죽어서 충신을 선택할 수 밖에 없을 만큼 이성계의 후손인 선조의 견제와 시기심과 방비는 철저하였다. 임란 후에 이순신이 만약 새로운 나라를 세워서 개혁하였다면 한반도는 부흥하였을 것이고 300년 후에 일본에 합병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 땅이던 만주에 대하여 한국인들이 그리워하듯이 일본인들은 백제의 땅이던 한강이남의 땅에 대한 그리움이 유전자에 박혀 있기 때문에 기회만 오면 한반도를 침입하곤 하였다. 당나라라는 대륙세력
에게 그들의 조상 땅을 억울하게 뺏앗겼으므로 다시 찾을 권리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일본은 후방이 없기 때문에 왜열도가 통일만 되면 항상 한반도로 올라온다. 오늘날도 미국이라는 대형이 없다면 한반도를 두고 중국과 일본은 다시 싸울 것이고 한반도는 또 다시 국제 전장터가 되어 피해를 입을 것이다.

나라를 개국하지 않으면 전쟁이 끝난 후에 공이 많고 뛰어 난 장군들은 자의든 타의든간에 반드시 죽는다. 유방의 한신장군이 토사구팽이라 하며 죽임을 당하였다. 홍의장군 의병장인 곽재우도 왜란에 공을 많이 세웠으나 왜란 후에는 선조에게 등용되지 못하고 재야에 묻혀 살 수 밖에 없었다. 선조는 곽재우나 의병장들도 두려웠다. 하물며 이순신에 대한 두려움과 열등감은 매우 컷다. 왜란에 공이 많은 영의정 유성룡도 왜란 후에 선조에게 오히려 버림받고 안동하회마을로 낙향하여 징비록을 저술하며 여생을 재야에서 뭏혀서 보내야 했다. 선조는 왜란 시에 공이 많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오히려 그들을 먼저 제거하였다. 선조때부터 붕당에 의한 당쟁으로 조선은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기 시작하며 약화되었다. 선조는 붕당 정치를 오히려 조장하고 대신들에게 분열을 통한 지배술(divide and contol)을 구사하며 dirty 정권을 유지하였다. 그 결과는 300년후의 한일합방으로 귀결되었다.

쿠테타로 집권한 그들의 조상 이성계와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을 미연에 제거해 간것이다. 조선 500년 동안 이성계의 후손들은 이성계와 같은 역성 역모를 꾸밀 수 있는 자를 가장 경계하여 미연에 제거하여 갔다. 만약 임란 후 이순신 등의 역성혁명이 한 번 성공햇더라면 나라는 개혁되었을 것이고 한일합방으로 일본에 먹히지 않았지도 모른다. 임란 후에도 썩어 빠진 한양 선조 정권의 계속된 연장은 한반도에 불행이 되어 300년 후 마침내 일본에 나라를 잃게 되고 일본에 의한 타의적인 개혁이 강제되었다.

신라와 조선의 이성계도 사대를 하고 싶어서 한 것은 아니었고 일본을 막으려면 대륙세력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고 생각하였다. 그 당시에도 일본은 그만큼 강대하였다. 임란 이후에 또 다시 팍스 청나라에 의한 300년간의 평화가 왔으나 조선은 부패한 소수 외척세력에게 농락 당하다가 나약해지며 한일합방으로 기억코 일본에 먹혔다. 일본은 663년 백강전투에서 당수군에게 패한 후에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잃고 임진왜란으로 다시 침략하였다가 물러나더니 기억코 한일합방으로 한반도 전체를 먹었다. 북부여와 가야와 백제의 후손들인 일본인은 그들의 조상땅인 한강과 금강 유역과 낙동강 하류 유역에 대한 권리와 그리움을 1250만에 일시적으로 풀 수 있엇다. 미국에 의하여 한반도에서 물러 난 일본은 미국이 한반도에서 떠나면 바로 다시 들어 올 것이다. 그만큼 한반도 특히 남쪽 4도는 일본에게 사활적으로 중요하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일본은 한반도 남쪽 4개도를 할양해달라고 명나라에게 요구한 바가 있었다. 이와같이 남북분단의 뿌리는 깊다.

일본이라는 타력에 의해 한반도는 모든 것이 일본식으로 바뀌고 낡은 이조봉건제도는 사라지며 새로운 질서가 들어섰다. 국민학교라하여 전국민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개시한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일제이었고 그 전국민 교육의 힘으로 한국은 선진국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조선은 백성들이 무식해야 통치하기 쉽다고 하여 소수 양반들에게만 교육의 혜택이 돌아가게 한 것과 크게 대비되는 일제의 전국민교육화 정책이었다. 소수 외척 양반에게 억눌리던 중인과 평민과 천민들은 썩어 빠진 조선정권을 버리고 일제를 환영하였다. 박정희도 그 중 하나였다.

세금을 걷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지만 한반도의 토지대장과 임야대장을 처음 만든 것도 일제이고 지금도 우리가 쓰고 있다. 일제가 만들어 놓은 대부분의 제도를 해방 후에 한국은 그대로 이어서 쓰고 있다. 그만큼 봉건조선의 제도보다는 일제의 제도가 좋았다는 반증이다. 어두운 면의 뒤에는 반드시 좋은 면도 있는 법이다. 모든 것이 좋거나 모든 것이 나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은 조선 500년 동안 착취만 해갔지만 그래도 일제 36년은 한반도에 많은 건설과 교육과 개혁이 있었다. 친일파를 토대로 오늘 날 한국은 부흥할 수 있엇다.

잔뜩 힘이 커진 일본은 미국에게까지 도전하엿다가 미국-중국-소련의 포위로 무참히 무너졌다. 미국의 압력에 한 번 물러서면 일제는 중국과 동남북아에서 구축한 대동아 공영 대제국이 무너질 것으로 보아 도라도라도라 작전의 하와이 기습공격을 감행하며 미국과의 강화를 목표하였으나 미국은 강화의 타협이 아닌 전면전으로 치고 나왔다. 중국에서 모택동과 장개석의 군대들과 싸우기도 버거웠는데 태평양을 건너 온 미국의 군대까지 상대하기에는 일본은 힘이 부쳤다. 더구나 원자탄은 저항의 의지마저 사라지게 하여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되는데 8.15 당시 소련군은 이미 새치기로 북한에 들어 와 있었고 미군은 아직 오키나와에 있었다. 소련군이 맘만 먹으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미국은 새치기한 소련군에게 38도선에서 멈출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원자탄이 없었던 소련군은 같은 연합군인 미국을 거역할 수 없었다. 이로서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은 분단되며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미국과 소련에 의하여 일본이 분단되었어야 했으나 일본은 원자탄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서 전적으로 미국에게 점령되며 분단되지 않고 재기할 수 있었다. 대신 한반도가 분단되었다.

미국의 힘으로 일본이 물러났으나 새치기한 소련에 의하여 한반도는 허리가 잘려 분단이 되고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최전선으로 대립하엿다. 북의 국제정세상의 오판으로 시작된 6.25 국제전쟁이 3년간 지속되었으나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은 한반도 전체를 상대에게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서로 깨닫고 휴전선에서 적당히 타협하였다. 이로서 분단은 고착되었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나 제 2의 6.25 전쟁같은 전면전은 일어날 수가 없게 되어 평화가 지속되었고 한국은 경제적으로 부강해졌다. 6.25 전쟁시 미군의 병참역할을 하였던 일본은 특수로 재부흥의 발판을 마련하였으니 결과적으로 반일파 김일성이 일본을 도우는 아니러니가 되었다. 국제정세와 역사에 무식하였던 젊은 혈기의 김일성의 6.25 도발은 결과적으로 한반도만 쑥대밭이 되고 일본은 부흥하게 되었다. 어리석은 국제정세 판단이었다.

평생을 외교적으로 독립운동을 한 미국파 이승만이 국제정세를 보는 안목이 뛰어 나서 남한만의 정부수립의 불가피성을 빨리 알아차리고 집권하며 일본과의 단절이 있을 수 밖에 없었으나 5.16으로 친일파들이 전면에 재등장하면서 일본과의 국교가 수립되고 일본에 다시 빨려들어갔다. 일제가 심어 놓은 친일파들의 전면 등장은 일본이 바라던 바였고 미국이 적극 후원하며 한미일 동맹의 기초가 되었다.

한국은 일본따라 하기를 죽자살자하여 세계 14-15위의 국가가 되었다고 하지만 강대국들의 변방이기는 마찬가지이다. 한반도가 강대국들의 변방으로 밀려나게 된 뿌리는 만주를 포기한 위화도 회군이었다. 자주독립 강대국을 향한 최영의 위험한 도박은 사대주의의 이성계에게 빈틈을 보였다. 핵을 개발하여 상국 미국으로부터 간섭을 배제하려는 박정희의 위험한 도박은 그의 죽음으로 귀결되었다.

처음에 개성에 도읍을 정한 궁예는 개성출신 왕건이 내심 두려워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러나 개성의 왕건은 철원까지 쫓아와서 기억코 쿠테타를 성공시키고 500년 고려왕조를 열지 않앗던가. 2인자 무장은 항상 정권에 위험한 존재엿다. 궁예도 왕건에게 빈틈을 보였고 왕건은 단숨에 철원을 공격하였고 궁예는 명성산에 쫓기어 들어 가서 왕건을 신임한 것을 후회하며 크게 울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다만 왕건은 외세를 쿠테타에 이용하지는 않았고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북방정책으로 쿠테타를 정당화하려고 하였으나 이성계는 명나라의 위세를 암암리에 쿠테타에 이용하였기에 만주로의 북방정책은 애초에 불가능하였으며 함경도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여 김종서의 육진 등으로 압록강-두만강을 경계로 조선의 영토를 확정하였다. 함경도는 조선의 성지와도 같았다. 이성계의 5대조들은 함흥과 심지어 두만강 유역의 경원까지 이주하면서 살아 남은 역사를 가지고 있엇고 그 위치는 정확히 조선의 영토와 일치한다.

쿠테타로 집권한 열등감을 보상하기 위한 경제 발전으로 힘이 좀 커졌다고 핵개발 시도 등으로 상국 미국과 대립하며 밉보였던 18년 왕조 박정희도 인권을 앞세운 상국 미국의 공세에 빈틈이 나타났고 마침내 부하에게 허무하게 무너졌다. 또 다른 대국민 유혈 쿠테타를 일으킨 신군부는 핵개발부터 버리고 상국 미국에 아부를 떨며 정권을 인정받았으나 개-돼지 취급을 받은 국민들은 자유가 더욱 억압되었고 국가폭력에 시달리며 단지 먹고 사는 데만 만족하여야 했다. 말만 잘 들으면 독재자라도 인정하는 미국은 더 이상 인권 등으로 압박하지 않고 신군부의 폭력을 눈감아 주었다.

상국은 말만 잘들으면 이성계든, 박정희든, 전두환이든, 김씨 왕조이든지 다 인정해주나 말을 잘 안 들으면 다른 이유를 대면서 압박하여 기억코 무너트린다. 중국이 말 잘 안듣는 북에 대하여 똑 같은 방식으로 김정남카드를 흔들었으나 위기를 느낀 집단이 그를 제거해버렸다. 중국 말만 잘 듣고 있다가는 북의 주민들(특히 함경도민)이 남으로 다 도망갈 지도 모르고 이성계와 같이 상국인 중국을 등에 업은 쿠테타가 발생할 지도 모르기에 핵을 움켜쥐고 싶은 욕망은 증대되었다. 북한정권의 중국으로부터의 안정과 독립이 북핵의 또 다른 목적이다.

독사눈의 변태적 군사정권이 억지로 7년을 더 버티엇으나 민심은 직접선거를 원하였다. 민주세력의 분열로 노태우 정권이 일시적으로 들어 섰지만 도도한 주권재민 민주주의의 흐름은 김영삼, 김대중을 선택하였다.
한국은 산업화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에 성공한 몇 안 되는 개발도상국으로 칭송 받았고 마침내 OECD에 가입하며 선진국에 들어섰다.
권력자가 쫓겨 나가기도 하고 총 맞아 죽기도 하였으며 감옥에 가기도 하고 국민들의 힘으로 탄핵을 받아 쫓겨 나기도 하는 역동적이고 매력적인 민주주의 국가가 되니 북한은 자국민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더욱 더 폐쇄적으로 가고 핵이라는 협박수단에 의존하지 않고는 정권 생존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한국과 미국에 우호적이 된다면 북한주민들은 경제적으로 부강한 한국으로 대거 내려 올 것이기에 북정권은 억지로라도 미국과 한국을 적대시 하며 핵을 움켜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으나 속사정은 정권유지이고 자국민 이탈 방지책이며 대 중국 독립이다. 그들로서도 핵이라는 고육책을 쓰지 않고는 정권유지가 불가능한 처지이다.

중국견제와 일본방어를 위하여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인 한국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미국이 한국을 보호하고 지지하여 준 덕에 이나마 한국은 세계 20대 내의 강국이 되었으나 4마리의 사자에게 포위된 형국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중국에 완전히 등을 돌리고는 한국은 더 이상 발전하기 어려운 시기에 도달하였다. 미국과 중국사이에 등거리 외교가 그 만큼 중요한 시기에 도래하였다. 중국이 달라들면 미국은 일본 편을 들고 일본이 달라들면 미국은 중국 편을 들엇엇다.

지금은 중국이 경제적으로 맨만한 한국을 물어 띁고 있으나 다음에는 누가 물어 띁을 지도 모를 일이고 중국도 한국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한다. 중국은 일본을 물어 뜯는 시늉도 못한다. 남북한은 각기 두 마리의 사자에게 의탁하여 나머지 2마리에게 물리지 않는 차선의 선택을 강요받았으나 지금은 등거리 외교를 하는 것이 유리하다.. 고래로 일본은 중국에 의존하지 않고 홀로 생존할 수 있었고 한반도는 중국에 의존하지 않고는 살기가 어려웠다. 중국에게 한반도는 만만한 상대였고 일본은 껄끄러운 상대이다. 미국까지 가세한 지금은 더욱 복잡한 형국이 되었다. 한국에게는 미국도 필요하고 중국도 필요한 형국이 도래하였다.

한반도를 둘러 싼 5000년 국제정치 역사의 결론은 휴전선을 경계로 나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북한이라는 중국의 울타리는 중국에게 절대로 필요하다. 압록강-두만강의 1000Km를 경계로 미국 등의 해양세력과 직접 접하는 것을 중국은 원치 않는다. 따라서 분단은 고정되었고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말은 사나울 지 모르나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5000년 역사의 귀결을 누가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국제정치상의 졸들은 더욱 더 남북분단의 귀결을 부정할 힘이 없다. 이제는 한국은 미국 일변도에서 탈출하여 유연해져야 더 강대해질 수 있다.

전쟁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입이 사나우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겁먹은 개는 짖으나 사나운 개는 바로 물어 버린다.
명나라라는 상국에 알아서 아부하고 배경삼으면서 회군한 이성계는 원나라라는 상국의 보호가 사라진 고려왕조와 최영 정권을 바로 한 번에 물어버렷다. 한반도에서 상국이 없는 자주독립파 정권은 항상 위험하였다.

고종이 대한제국이라하여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엿더니 결과는 나라는 문을 닫고 일제에 의한 한일합방이었다. 청나라의 보호가 살아 있었더라면 감히 일본이 한일합방를 하였겠는가? 청일전쟁으로 청나라부터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일제는 한반도를 합병하였다. 상국(청나라)을 잃어 버린 허약해진 조선을 일본도 바로 물어 버렸다. 상국의 보호가 없거나 대항하는 한반도의 정권은 바로 무너진다. 원나라의 보호가 없어진 고려왕조를 물어버린 것은 명나라를 배경으로 한 이성계였다. 고려정권이 명나라에 붙었다면 이성계의 쿠테타는 원천적으로 불가하였을 것이다.

북한은 대륙세력인 중국과 소련을 상국으로 하고 있고 한국은 해양세력인 미국을 상국으로 하고 있는 한, 절대로 서로 무너지지 않는다. 적대적 공생관계이며 세력균형에 의한 평화이다. 한쪽이 상국의 보호가 없어진다면 세력균형은 무너진다. 한반도 전체를 상대 세력에게 주기에는 너무 중요한 위치이기에 반씩 나누어 가지기로 이미 6.25 때에 합의되었는데 감히 누가 이것을 깰 수 있는가? 다만 한국은 커졌고 이제는 유연해져야 하며 중국과 러시아도 이용하여야 하며 이용할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북한은 미국과 일본과 계속 척이 져서 갇혀 있을 때 우리는 중국과 러시아를 파고들어야 한다.

남북의 경제력의 차이가 너무 벌어져서 북한 주민들을 가두어 두기가 어렵게 되었다. 3만명이라는 탈북민이 현재도 한국에 국민으로 살고 있다. 핵이라는 극단성으로 너도 죽고 나도 죽자고 덤비면서까지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려하지 않으면 북주민들은 자신들을 환영하며 국민으로 바로 인정하는 한국으로 대거 탈출할 것이다. 특히 함경도인들은 흥남철수에서 보았듯이 더욱 더 탈출할 것이다. 핵이 아니면 북주민들도 지키지 못할 정도의 경제적 실력인 것이다.

핵은 북한 내에서 쿠테타를 예방하는 효과가 잇으므로 불안한 정권일수록 핵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내부의 불만을 외부세력 때문이라고 돌리며 주민들을 도망가지 못하게 더욱 더 꽁꽁 묶어버린다. 발해가 중국으로 흡수되었듯이 북한은 더욱 더 중국화될 것인데 그것을 두려워한 북한은 핵으로서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확보하려고 하기도 한다. 북한핵은 대 미국용이라기 보다는 대 중국용이고 국내용이다.

어차피 북핵문제는 해결이 안 된다. 따라서 한국도 어떠한 형태이든 핵은 핵으로만 막을 수 있다. 괌의 미국핵이 우리를 지켜줄 수만 있다면 한국은 핵을 들여 놓지 말고 북한을 압박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맞다. 함경도 사람들은 한양정권에 속하였던 이조 500년의 역사의 향수가 있어 더욱 더 탈북하여 서울로 온다. 다만 평양사람들은 못 살아도 평양정권을 지키려하며 한양정권에 예속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평양 고구려, 고려의 자존심을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한양에 예속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열악한 북한이 붕괴되지 않는 이유 중 내부적 요인이다.

한반도를 둘러 싼 5000년 국제정치의 귀결의 타협인 휴전선이 무너질 수 없는 이유이며 서로간에 말은 사나우나 6.25 같은 전면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 이유이다. 할 일 없는 언론의 말쟁이들만 전쟁을 팔며 떠들면서 호구지책으로 삼을 뿐이며 위기를 부풀려 광고장사하기 바쁘지만 현명한 국민들은 너무나 평온할 뿐이다. 단언컨데 전면 전쟁은 없다. 다만 협박과 국지전은 있을 것이다. 한국만을 위하여 미군이 한국에 있지 않다. 미국의 세계전략상 한국이 미국에게 절대로 필요한데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겠는가. 아니면 중국이 울타리 역할을 하는 북한을 포기하겟는가? 역사적으로 중국편이엇던 한국에게도 일정한 영향력을 가지는 것을 원하는 것은 중국이다. 중국이 더 아쉬운 형국이다. 한국을 이것을 이용하여 중국과 러시아에
진출하여야 한다.

상국 미국이 떠나면 한국은 또다시 중국이나 일본을 상국 삼아서 의지하여야 한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에게도 절대로 필요하다. 서로간에 누님도 좋고 매부도 좋은 일이다. 미국이 떠나면 한국도 핵을 반드시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미국의 보호가 없다면 핵없는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먹이감이 되기가 너무 쉽기 때문이다.

중국에게도 북한이 절대로 필요하니 석유주고 외화주며 살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입소리만 요란할 뿐 전면 전쟁은 없다. 양측 모두 뒤에 상국이 버티고 있는 한 도발은 불가능하다. 서로 이길 수 없는 게임이다는 것을 당사자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6.25로 그것은 이미 증명되었다. 당시 평양과 서울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는데 오늘 날은 엄청난 건설을 각자 가지게 되어 자신의 파괴를 감수하고 상대를 치지는 못한다.

비슷한 실력의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자신의 한쪽 팔을 내주고 상대의 목을 치는 것을 연습한다. 그러나 자신의 목이 베일 것을 각오하고 상대의 목을 치지는 못한다. 더구나 졸은 전쟁 의사결정할 권한이 없다. 상국의 허락없이 전쟁 도발은 원천적으로 불가하다. 어차피 전쟁이 나면 장기전이 되는데 상국의 보급없이 어떻게 졸만의 전쟁이 가능하겠는가. 6.25 때처럼 상국들이 대신 싸워 주는 전쟁이 될 것이다. 각자의 상국들은 지금 이 시점에서 한반도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김일성의 무모한 남침때문에 어쩔수 없이 중국도 참전하게 되고 30만명의 중국청년이 죽엇다. 오늘날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중국도 또 다시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우왕과 최영이 개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을 가면서 종축이 긴 한반도에서 지연전을 펼쳤다면 이성계의 쿠테타는 내분이 발생하여 성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왕이 잡히지 않으면 반란군은 내부분열로 대개는 스스로 무너진다. 선조, 인조, 이승만, 김일성도 각자 종축이 긴 한반도의 남,북으로 피난가서 재기하엿다. 종축이 길기 때문에 허리를 경계로 분단이 되기도 쉽다. 발해와 통일신라가 대동강과 원산을 잇는 잘록한 선으로 분단되어 300년을 지속한 바가 있으며 한국은 휴전선으로 차단된 섬아닌 섬나라가 되어 대륙으로부터 분리되며 타의로 해양국가가 되었고 대륙세력을 막는 최전선이 되었다.

2500년전부터 진시황의 중국대륙 통일은 고조선을 압박하고 고조선은 한반도의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하며 남쪽 삼한의 정치환경이 급변하였다. 이 때를 전후하여 대한해협을 건널 수 있는 크기의 배를 만드는 기술이 영산강하류와 낙동강 하류의 어민들에게 생기게 되며 대마도 건너 큰 땅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고 급변하는 정치환경속의 남서해안의 한반도인들이 배를 타고 규슈로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가보니 동남아계의 소수의 조몬인들이 수렵채취를 하고 있는 원시 상태로서 땅은 넓고 인구는 적었다. 낙동강 하류와 영산강 하류지역의 앞선 선박문화는 그 지역인들을 왜열도로 들어가게 하였다.

대륙세력인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진으로 웅진(공주) 백제후왕과 백제인들이 남쪽으로 피난간 후에 부산(임나가라)을 거쳐 왜열도로 피난을 가서 오진천왕이 되며 고대국가 야마토 왜를 건설하였던 바와 같이 왜열도는 한반도 종축의 피난 연장선이었다. 대륙세력 당나라에게 백제가 망하며 또 다시 왜열도로의 피난행열은 이어지고 왜나라는 인구가 급격히 늘며 강대해져갓다. 피난 간 그들의 후손들이 힘을 키워 다시 한반도로 북상하며 임진왜란을 일으키기도 하였고 한일합병하였다가 반은 미국에 넘겨주고 반은 역사적으로 한반도 상국이었던 대륙세력이 다시 차지하였다.

대륙세력이 내려오는 길목이면서 해양세력이 올라오는 길목인 한반도는 양세력간의 국제전쟁이 일어나는 곳이었다.시대에 따라 대륙세력의 주체만 달라져서 한나라, 고구려, 당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소련, 중국 등이 대륙세력이고
왜, 일본, 미국 등이 해양세력이었다. 임란시는 정명가도라 하며 명을 치기 위한 길을 빌려달라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현재는 길목을 양세력이 반으로 나누어 가지니 힘의 균형은 평형이 되고 불안하게 보이지만 평화는 지속되었다.

조선의 국토가 남북으로 갈리게 된 기본적인 이유는 발해-신라의 남북분단이고 가까운 이유는 일제에 의한 조선의 합병이었고 일제패망후 소련의 새치기 북한점령이였다.. 일제가 원자탄을 맞자마자 소련은 새치기로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와 북한으로 내려왔다. 소련에 망명중이던 김일성은 로토 행운을 잡았을 뿐이다. 모택동은 그 당시 장개석과 한참 싸우는 중이라 북한에 진군하지 못하였다.

1945년 이후 소련과 북한의 지원으로 모택동은
승기를 잡고 장개석을 대만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전멸위기에 빠진 장개석 군대를 인도차이나를 통하여 간신히 대만으로 후송시킨 것은 그나마 미국의 해군력이었다. 이로서 중국도 분단되었다. 장개석의 패주에 자극받은 김일성은 스탈린과 모택동의 지원아래 1950년 전면남침을 감행하며 이승만을 제주도로 몰아내려고 하였으나 또 다시 한반도는 양세력간의 국제전장터가 되어 완전히 파괴되고 휴전선으로 분단이 재 고정되었다.

패전국 일본은 군수특수로 이틈에 재빨리 재기할 수 있엇다. 소련의 스탈린은 한국전에 중국을 끌어들여서 미국과 싸움을 붙이고자 하였다. 중국은 자국군인 30만명을 전사시키고 북한을 지켰으나 미국의 적으로 찍혀서 20년동안 국제사회에 나오지 못하고 뒤로 처지게 되었다. 스탈린의 대중국 전략이 맞아 떨어졌다. 1970년대에서야 등소평은 소련을 넘어 서려면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하고 흑묘백묘론으로 미국의 허락하에 중국은 뒤늦게 발전하기 시작하며 21세기 들어서면서 일본과 소련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국력을 이루며 미국과 충돌하고 있다. 등소평의 무서운 혜안은 중국을 깨우쳐서 G2의 대국이 되도록 하였다.

원자탄에 무조건 항복을 한 일제는 만주와 북한을 소련의 먹이감으로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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