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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균 가습기의 문제
2016-06-16
의사가 보는 살균가습기의 문제
 
학자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구멍가게도 무신불립
2016-06-16
어린아이들이 감기에 걸리면 공기건조를 방지하기 위하여 가습기를 틀어 주곤 하였다.
살균 가습기는 폴리헥사메틸렌 구아니딘이라는 유해 살균제를 추가하여 분무되도록 한 것인데
이 살균 화학제가 폐에 무해하다 고 회사측에서는 선전하였으나
사실은 폐에 매우 유해하여 폐섬유화을 일으키고 아이들을 포함한 사람들을 죽게 하기도 하였고 살더라도
폐에 비가역적인 손상의 영구적 후유증을 남겨서 호흡부전으로 산소마스크를 달고 살아야 한다. 이와같이 심하면 사망이고 심하지 않으면 폐가 섬유화되어 폐가 망가진다.

이런 치명적인 살균 가습기가 무해하다 고 연구보고서를 제출한
서울 모 대학 동물학 교수는 돈 몇 푼 받고 실험질 쥐가 죽었는데 죽지 않았다 고 거짓 연구보고서를 만들어서
결과적으로 죄없는 어린아이들을 희생시키는 데 가담하였다. 학자가 썩으면 관료가 썩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는 하나의 실증이다.

그 교수는 호흡기 의사도 아니고 일반 의사도 아니다.
동물학자일 뿐이다. 사람에 관계되는 일은 의사에게 맡겨야 하며
동물학자에게는 맡겨서는 아니 된다는 실증이 된 것이다.

의사들에게 실험을 맡겼더라면 그 살균 가습기는
인체에 유해한 것으로 미리 판명되어 판매허가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과 관련되는 것은 동물학자에게 맡길 것이 아니고 의사에게
맡겨야 한다. 의사들도 동물실험을 하니까 말이다. 호흡기 의사들은
누구나 폴리헥사메틸렌 구아니딘이 폐섬유화를 일으키는 매우 유해물질인 것은 다 안다.

단순한 가습기는 문제되지 않는다. 다만 살균 화학제를 첨가한 것이 문제일 뿐이다. 미세먼지도 폐를 통하여 혈류에 흡수되어 폐 뿐만 아니라 전신적인 질환을 일으킨다. 폐는 오장육부 중에서 환경에 가장 취약한 장기이다. 그런 점에서 담배연기부터 피해야 한다. 더구나 폴리헥사메틸렌 구아니딘 같은 유해 소독제는 폐에 치명적이다.

공기 환경의 오염은 이와 같이 치명적인 것이다. 공기 환경의 보존을 위하여 더 많은 관심과 투자가 있어야 한다.

의료보험 약들은 치명적인 부작용도 없이 약간만 이상해도 퇴출시키는데 한약이나 화학제품에게는 법적으로 왜 그다지도 관대하여
억울한 죽음을 만드는 지 모르겠다. 화학제품도 인체와 관련되면 의사와 식품안전청의 감시를 받아 통과하여야만 제품화되어야 한다.
한약도 식품안전청의 인체 안전성 검사를 통과한 후부터 약으로서 유통시켜야 한다. 미국에서는 한약은 약으로 유통시키지 못한다. FDA를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살균 가습기도 판매허락이 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한국은 아직도 중대한 일을 운에 맞기는 미신적인 사회이다.

한국은 아직도 각종의 미신이 지배하는 원시 사회이다. 식약청은 그런 유해한 제품이 팔리도록 방관하였거나 유해하다는 것을 몰랐거나 일 것이다. 간판과 껍데기만 있고 실질은 없는 기구의 결과는 이와같은 것이다. 미신은 위안을 줄 수 있으나 과학의 활용은 복음을 줄 수 있다. FDA를 통과하지 못한 것은 미신이고 통과한 것은 과학이다.

소 잃고 외양간도 안 고치는 미신적인 사회에서는 더 큰 사고는 반복될 것이다. 그래도 지구는 돌겠지만 더이상 억울한 죽음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학자는 이 사회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이다. 썩은 학자는 썩은 관료보다도 사회에 더 나쁘다.

일제에게 배운 식민사관의 식민지 사학자들이 해방후에도 강단을 독점하면서 민족사를 망가트렸듯이 각 분야의 썩은 학자들이 사회를 좀 먹고 있다. 그런 점에서 각분야의 학계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다음과 같이 올바른 민족사를 기술하려 한다. 2000년간의 환국, 1500년간의 청동기 배달국(환웅천왕), 2300년간의 청동기, 철기 시대 단군조선이 있었고 150년간의 철기시대 북부여/동부여/위만조선의 시대가 있었으며 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왜의 시대가 있었다. 백제를 반도 남부여라 하였고
왜를 열도 부여라 하였듯이 만주의 고조선-북부여계가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 왜를 건국하였다.

진시황제가 6국을 멸하며 한족을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고역에 시달리던 통일 진나라 백성들의 일부가 동으로 도망을 쳐 평양의 마한에 도착하니
평양 마한왕은 그들을 마한의 동쪽 진한(후에 신라)에 들어 가 살게 하였다. 후에 고구려에 정복당한 낙랑국 사람들도 신라땅으로 피신해 들어갔다. 이와같이 중국과 만주에서 난리가 나면 한반도로 피난민이 밀려왔고 한반도에서 난리가 나면 왜열도로 피난민을 밀려 들어갔다.

중국전국시대 하북성의 연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다투던 만주 왕검성 단군조선이 통일 한 고조 유방시대에 큰 변화가 있었다. 중국을 재통일한 한고조 유방에게 쫐긴 연나라 장수 위만이 만리장성 옆의 단군조선으로 의탁하러 들어왔다가 쿠테타를 일으켜 단군조선 준왕을 쫓아내고 위만조선을 세웠다.

이때 위만에게 패하여 쫓긴 단군조선 기 준왕과 궁인들은 배를 타고 바다 건너 마한 평양으로 들어 와 마한을 치고 한왕을 자처하였다가 다시 쫐겨 행주산성과 청주와 익산의 금마로 들어 가 그 후손이 그곳에서 후기 마한왕으로 200년을 다스렸다가 백제에 복속되었다. 청주 한씨는 기 준왕의 후손이다. 선우 씨는 기 준왕와 함께 온 귀족이었다. 그후 평양 마한은 낙랑국이 되었다가 고구려에게 복속된다.

위만조선도 100년도 못가서 한무제의 침입을 받고 망하였고 이때 서남 만주 왕검성을 중심으로 한사군이 일시적으로 설치되었다. 이때도 많은 고조선 예족 유민들이 동만주쪽으로 피난을 갔고 일부는 한반도 삼한 동해안과 남해안으로 또 일부는 왜열도까지 가야인과 마한인과 함께 밀려 들어갔다. 일본을 뜻하는 왜라는 말은 이와같이 예족이 세운 나라라는 뜻이다. 이때 한무제는 서북 유목민 흉노도 쳐부시게 되고 흉노는 살기 위하여 동유럽까지 밀려들어간 게 훈족이고 훈족은 다시 게르만족을 밀어내고 밀린 게르만족은 로마로 침범하여 들어가게 되어 로마가 망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풍선효과로 기마 유목 민족의 대이동이 동쪽으로는 왜 열도까지 가게 되고 서쪽으로는 동유럽까지 가게 된 것이다.


북부여, 고조선과 흉노는 배달국(환웅천왕)에서 나온 형제국이었다. 그 후예들은 모두 하늘의 자손(천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인 황제 헌원의 후손인 황허 중국족에게 굴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천손이 어떻게 인간의 후손인 황허족에게 굴복하겠는가? 왜도 천왕이라고 하면서 하늘의 자손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조상이 배달국, 고조선, 북부여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천손이 내려왔다는 김해가야의 구지봉 이야기가 왜의 천조대신의 구지하라 이야기로 각색되었을 뿐, 똑 같은 이야기로서 처음에는 구지봉 천손의 이념을 가진 가야인들이 규슈에 많이 들어 가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북부여 천손사상의 백제인들이 왜로 많이 들어간다.

그러나 북만주의 고조선 땅에서는 한고조 유방시대에 북만주 고리국에서 일어난 해모수가 고조선을 북부여로 계승, 창업하여 남만주의 위만조선과는 별개로 북만주에서 100년 동안 북부여 4대를 지속하다가 위만 조선을 무너트린 한무제의 침입을 역시 받았다. 이 때에 북부여는 무너지지 않으며 단군조선 마지막 단군인 고열가의 먼 후손인 고두막한 장수가 두각을 나타내며 잘 막아 무찔렀고 그 공으로 당시 북부여 태자 헤부루로부터 독립하여 졸본으로 도읍을 옮겨 졸본부여라는 또 다른 부여를 창업하고 단군 동명성왕(동명국)으로 등극한다. 이 때 헤부르 북부여는 더 동쪽으로 이주하며 동부여로 명맥을 이어간다.

한무제 침공을 물리친 공이 많은 의병장 고두막한 장수가 졸본에서 졸본부여의 단군으로 독립한 것이다. 고두막한은 혈통상으로 단군조선의 마지막 단군 고열가의 먼 후손쯤은 되나 북만주에서 일어 난 북부여 창업자 해모수의 직계 후손은 아니다.

당시 북부여 태자이던 해부루는 고두막한 장수에게 북부여 단군자리를 뺏앗기자, 해모수 북부여의 정통성을 가지고 더 동북쪽으로 쫓겨가서 우수리강 근처의 가섭원 동부여를 세운다. 이때 고주몽의 부친인 고블리거는 역시 해모수의 후손이므로 당연히 해부루를 따라 동부여로 갔고 옥저후을 하였다.

동부여 태자의 시기를 받고 죽을 위험에 처한 고블리거의 아들인 고주몽은 졸본부여(동명국)로 도망 망명을 하고 졸본부여의 6대 북부여 단군이자 고두막한의 아들인 고무서의 딸 소서노와 재혼하고 고무서가 아들이 없자 왕통을 받았다. 북부여 창업자 해모수의 방계 혈통인 고주몽이 무혈로 다시 졸본부여의 7대 단군으로 등극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도망나왔던 동부여 일부를 쳐서 합병하며 갈라졌던 북부여세력을 통일하고 국호를 고구려로 개칭하였으며 고조선의 옛땅인 서남 만주 및 평양 낙랑국도 복속시키는 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동부여의 일부 세력은 5세기까지 요동만주에서 부여국으로 계속 지속되었다가 한반도로 피난이주하면서 또 다른 부여국인 근초고왕의 백제에 합쳐져서 백제가 급성장하게 된다.

북부여를 창업한 해모수가 고리국에서 나왔다하여 고주몽은 졸본부여를 고구려라고 개칭하였다. 따라서 고구려는 700년을 지속한 나라가 아니고 고리국에서 나온 북부여의 해모수로부터 900년을 지속한 나라이다. 고구려는 북부여 창업자 해모수가 시조(BC 230년경)이고 고주몽이 중시조인셈(BC 50년경)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단군 조선과 북부여의 직계이다. 백제도 부여에서 나왔다.

한무제의 침입을 물리친 공으로 해모수계로부터 정권을 뺏고 북부여 5대 단군이 된 고두막한의 손녀인 소서노는 해모수 방계후손 계통의 고주몽에게 일시적으로 왕통을 주었으나 자기 소생 아들인 비류나 온조가 고주몽의 후계자가 되어 고주막한 동명왕의 졸본부여 동명국을 이어갈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유리왕자가 아버지 고주몽을 찾아서 갑자기 나타나 고주몽의 해모수계 왕통의 후계가 되니 고주막한 손녀로서 원통과 비통을 안고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황해도와 한강유역에 백제를 세우고 졸본부여의 정통성을 이어갔다. 백제왕은 고씨가 아니고 부여씨이다. 비류와 온조는 소서노가 죽은 전 남편과 사이에서 난 소생으로 고주몽의 피가 원래 아니다.

따라서 십제는 소서노의 할아버지인 고두막한 동명성왕을 시조로 제사지내게 되다가 3세기에 요동 부여의 구태가 남으로 피난하여 십제를 합병하고 백제가 되면서 부여국 동명왕(해모수)에게 제사를 지낸다.백제에서 동명왕은 고주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부여국 해모수 동명왕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구려 중기에 고주몽의 묘는 평양으로 이장을 하여 평양에 있게 되었고 고주막한 동명성왕은
고주몽의 혈통상 조상이 아니므로 평양으로 이장하지 않고 그대로 졸본에 뭍혀있다.
고구려와 백제는 북부여에서 나왔지만 이와같이 혈통이 약간 다르다. 고구려는 부여 방계 고주몽계이고 백제는 해모수 부여 본계이다.

고주몽의 혈통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 고진의 증손자로서 북부여 창업자 해모수의 방계 후손이다. 고주몽의 아버지는 고두막한에게 쫓겨 동부여를 세운 해부루를 따라가서 옥저제후가 된 고불리거인데 그는 고진의 손자이자 해모수의 증손자이다. 따라서 고주몽은 해모수의 고손자인데 고두막한에게 뺏앗긴 북부여 왕통을 다시 해모수계가 되찾은 셈이다. 그리고 졸본부여(동명국)을 해모수의 고리국에서 나온 고구려라고 나라 이름도 바꾸어버렸다. 고두막한계의 졸본부여 공주인 소서노 입장에서는 주어 온 돌(고주몽)이 박힌 돌을 빼버린 격이 되었다.

한반도에 들어 온 주민들은 서남 만주의 고조선 예족 백성과 유민, 북만주의 북부여-고구려 맥족 백성, 진시황제의 만리장성 축조에 동원되었다가 탈출한 진나라 고역민들, 중국 연나라 백성 일부와 낙랑국 백성, 김일제의 후손인 서북 만주의 흉노족의 일파, 그리고 삼한의 토착 백성들이 혼합하여 살게된 것이다. 진한지역에는 고조선계와 진나라 한족계와 김일제의 흉노 좌현왕 일파가 혼재하여 박, 석, 김 백성이 되었고 최후에는 흉노 좌현왕 김일제의 후손인 김씨가 정권을 잡았다. 문무왕의 비석에는 한무제에게 포로로 잡힌 흉노 태자 김일제의 7대손인 김알지(성현왕)가 왕망의 신나라 정권에 가담했다가 후한을 세운 유수에게 쫏겨 경주에 들어왓고 자신은 그의 후손임을 명시하였다. 신라라는 이름은 왕망의 신나라에서 유래하였다.

북부여계의 맥족 고구려는 세력을 점차 키워갔고 한나라 시대 내내 만리장성을 넘어 한족을 괴롭혔으며 4세가 말에 광개토대왕이 황해도 전선을 우회하여 배를 타고 경기만을 따라 지금의 충남지역에 상륙하여
웅진의 비류 백제계 제후를 토멸하자 비류백제계 웅진 진씨 성의 백제 웅진 제후가 많은 피난민이 데리고 왜열도로 이민을 가서 오사카 지역의 갯가를 개발하고 가야계 천왕을 제압하며 야마토 정권을 확장하였다.

백제 전성기 근초고왕부터 왜로 진출한 백제계는 그의 아들 근구수왕이 왜로 가서 10대까지 지속된 가야계의 제 1 천왕조를 전복하고 백제계 제 15대 웅신천왕의 제 2 천왕조를 열며 4대를 지속하였다. 규슈와 혼슈의 오사카 지역에서 먼저 들어 온 가야계를 나중에 들어 온 백제계가 제압하자, 가야계는 혼슈의 더 북동쪽으로 밀려 들어 간다.

그로부터 30년 후, 고구려 광개토왕이 백제, 가야까지 쳐들어 오고 광개토의 아들 고진이 왜열도까지 쳐들어가 4대를 지속한 백제계의 제 2천왕조를 전복하며 일시적으로 고구려계인 19대 윤공 천왕이 되어 430년부터 450년까지 20년을 오사카 대화 왜을 다스린다. 백제계 왜왕 찬은 북쪽의 동경지역으로 밀려들어가 그곳만을 다스리게 되는 왜열도 남북 2국시대가 30년 동안 지속된다.
그 당시 왜열도에는 가야계, 백제계, 고구려계, 신라계 고을이 따로따로 있었다. 어느쪽이 천왕이 되는가는 시대에 따라 세력이 큰 쪽이
천왕을 하엿다.

왜 오사카 야마토의 정권까지 30년간 고구려계에게 뺏앗기고 동경지역으로 밀려들어가며 절치부심하던 백제계는 한성백제의 개로왕자가 왜열도에 들어와 패잔한 백제세력과 가야를 연합하여 광개토의 아들인 고구려계 19대 천왕을 전복하고 백제계 오사카 야마토 왜 정권을 회복시키는 왜 20대 사이 천왕(왜왕 제)을 하였다. 그후 한성 백제로 돌아 와서 개로대왕이 되고 대신에 동생 곤지가 왜왕 흥(고이)이 되게 하여 야마토 왜를 20년간 다스리게 하였다. 그 시절에는 이렇게 백제의 왕자가 야마토 왜왕을 하였다. 왜열도에서는 백제계가 고구려계를 이긴 셈으로 오늘 날 천왕의 피속에도 백제왕계의 피가 흐르게 된다.

한성으로 돌아 온 백제왕인 개로대왕이 고구려 장수대왕에게 망하자 신라에 구원병을 청하러 갔던 동생들 문주가 왕이 되어 웅진으로 급히 피신 천도를 하였으나 웅진 토착세력 해씨와의 분쟁으로 정세가 매우 불안하였다. 이에 477년 곤지(왜왕 흥)은 혼란한 웅진(공주)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한반도로 다시 나왔으나 3개월만에 암살당한다. 왜에는 사마 무령왕자에게 왜왕 무를 시켜 다스리게 하였다. 왜왕 무(시마)도 20년간 왜왕을 하다가 사촌동생(게이타이 천왕)에게 물려주고 반도로 나와 고구려와 싸우다가 동성왕을 이어 백제의 무령대왕으로 등극한다.

그 당시에는 천왕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었고 왜왕이라고 그들 자신이 지칭하였으나 후세 8세기에 일본서기를 쓴 사가들이 그 전의 왜왕들에게 천왕이라는 존칭을 갖다가 붙이게 된 것이다. 8세기 이후에는 그들 자신이 천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북부여계인 고구려, 백제가 다 망하자 유일하게 남은 북부여계인 왜가 하늘의 아들인 천왕을 자처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구려계 19대 고진천왕을 전복시키고 왜 20대 천왕(왜왕 제)을 하다가 한성백제왕으로 복귀한 개로왕은 한반도에서도 그의 조부 때에 광개토에 당한 치욕을 갚으려고 북위와 협력하여 고구려를 치려 사신을 보냈으나 북위가 협력을 거부하였고 오히려 고구려 장수왕을 분노케 만들기만 하였기에 장수왕은 3년을 면밀히 준비하여 마침내 475년 한성백제를 함락하고 개로왕을 참수하였다.(한성백제 멸망)

5세기 말에 장수왕에게 망한 개로왕 한성백제의 한강 유역의 온조백제계가 이미 곤지왕(왜왕 흥)이 다스리는 야마토 왜로 대거 건너 가서 온조 한성백제계에 의한 제 4 천왕조의 야마토 정권을 완성하고 곤지왕이 왜왕 흥(천령천왕)이 되어 22년을 다스린다. 이때부터는 큰집격인 한성백제가 망하였으므로 작은 집 격인 왜왕이 완전히 백제로부터 독립하고 오히려 큰 집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477년 곤지 천령천왕(왜왕 흥)은 죽은 개로왕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며 양아들인 사마 무령왕자에게 왜왕(왜무왕)을 맡기고 웅진(공주)으로 돌아와 문주왕을 도와 총리격인 내신좌평을 하다가 웅진 토착세력 해씨와의 분쟁속에서 갑자기 죽었다. 그의 시신은 왜로 옮겨져 왜왕 무(시마)가 세계에서 3번째로 큰 고분을 만들어 준다. 문주왕과 그의 아들 삼근왕도 2년사이에 웅진 토착세력 해씨에게 죽게 되자 왜 무왕(시마)은 곤지의 둘째 아들 다마를 규슈 백제 담로국 군사 500명을 호위 붙여서 웅진으로 보내며 동성왕으로 등극시켰다. 이때 같이 온 규슈 백제 담로국 군사 500명은 백제땅에 눌러 살게 되고 죽어서 왜 계통의 무덤의 형태를 백제땅에 남겼다.

478년 왜에서 송나라에 상표문을 보낸사람은 왜무왕으로 다름아닌 시마 무령이다. 시마 무령도 왜왕을 하다가 곤지의 아들인 사촌 형제(게이타이 천왕)에게 왜왕을 맡기고 친아버지 개로왕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왜열도를 떠나 479년에 함경도 청진에 상륙하여 군진을 세우고 그곳과 왜를 왕래하며 22년간 고구려와 싸우다가 501년에 동성왕에 이어 백제 무령대왕으로 등극한다. 당시 왜와 백제는 형제국이므로 시마는 이와같이 왜열도에서도 23년간 왕으로 재위하였고 백제에서도 20년간 왕으로 재위하였다.

만세일계라고
포장한 천왕계는 이와같이 4번(가야계-진씨의 비류백제계-고씨의 고구려계-여씨의 한성백제계) 피가 바뀌었으며 현재 일본천왕의 피속에는 백제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고 현재 일본천왕 자신이 고백한 바 있다. 졸본부여의 한강 쪽으로 망명 정권이 한성온조백제(백잔), 웅진비류백제(이잔)이고, 한반도 백제의 왜 열도 쪽으로 망명 정권이 야마토 왜이다.

조선(고조선),북부여의 정통성은 고구려, 백제,가야, 왜로 이어지다가 고려, 조선, 일본으로 이어진 것이다. 가야인들은 철기를 가지고 왜 열도로 가서 제 1천왕조를 열고 14대를 지속하였다. 왜는 처음에는 그들의 고향국인 가야와 마한과 친했다가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인 4세기 백제 최고 전성기왕 근초고왕이래 백제와 친하게 되고 백제 철과 말 등의 많은 교류가 있었으며 많은 백제인이 말과 선진문화를 가지고 일본열도로 대거 이주를 하였으며 왜열도에 오사카 나라지역, 규슈, 도쿄 동경지역 등에 3개의 다무로(담로)를 두어 백제 왕자들이 백제분국 형태로 다스렸다. 이때 백제계는 말을 처음으로 왜 열도로 가져가서 기마전술로 가야계의 제 1천왕조를 전복하고 백제계의 제 2천왕조를 열었다.

4세기 말에 광개토대왕의 백제와 가야 정벌로 한반도와 왜의 정치환경이 뿌리채 흔들리고 더 많은 백제 유민들이 왜로 피난 길에 올랐으며 웅진 백제제후를 하던 진씨 세력이 광개토왕에게 쫓겨 하동에서 배를 타고 왜의 오사카지역으로 피난 이민을 가며 가야계 왜왕을 전복하고 백제계 왜 야마토 정권을 확장하며 4대를 지속하였다.
백제계가 처음으로 왜열도에 말을 가지고 갔고 기마전술로 가야계를 더 북쪽으로 밀어 올리고 규슈와 오사카 지역을 지배하게 된다.

반도에서 세력이 커질대로 커진 고구려는 왜열도까지 광개토왕의 고진 왕자가 쫓아 건너 가 기존의 백제계의 왜왕(천왕)을 전복하고 30년간 고구려계 19대 윤공 천왕이 되어 오사카 야마토 왜는 고구려 세상이 되고 백제계 왜왕 찬은 동경지역으로 밀려들어 가서 그곳만을 다스린다.

5세기 중반에 왜로 간 개로왕자와 왜열도 북쪽의 백제계가 가야와 연합하여 광개토왕의 왕자인 고구려계 19대 천왕(제 3 천왕조)을 다시 전복하고 오사카를 중심으로 고대국가 야마토 왜를 완성하며 여씨 성의 왜왕 제를 하다가 한성으로 귀국하여 개로대왕이 되었고 동생 곤지에게 왜왕을 물려주었다.(곤지 천령 천왕=왜왕 흥). (제 4 천왕조) 이 때부터의 천왕은 개로대왕 여씨의 피가 오늘 날까지 이어졌다.

원래는 고구려와 백제는 북부여에서 나온 한 뿌리로서 원수지간은 아니었으나 백제 최고의 전성기 근초고왕의 아들 근수구왕자에게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쟁중에 화살을 맞고 죽임을 당한 것이 고구려-백제간의 원수가 된 시발점이 되어 고국원왕의 손자인 광개토왕이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자, 배를 타고 경기만을 가로질러 남진하여 웅진의 비류백제후를 토멸하였고 한성백제를 쑥밭으로 만들고 돌아갔다. 그 때 비류 백제계의 웅진 백제제후와 유민들(특히 공주지역의 유민)이 왜열도로 대거 피난을 가게되고 오사카 지역에 갯가를 개척하며 정착한다.

그 당시 규슈에는 이미 비류백제계의 담로국이 지배하고 있었고 오사카 지역은 가야계가 규슈로부터 피난을 와서 가야계 천왕을 하고 있었는데 오사카 지역에 후발로 도착한 백제계가 가야계 천왕을 전복하고 15대 천왕이 된다.

그 후를 이어서도 장수왕과 개로왕의 극한 대립으로 개로왕이 죽고 한성은 쑥밭이 되었고 일부 백성은 포로로 잡혀가고 일부는 곤지왕의 왜로 피난을 간다. 고구려는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은 격이 되었으나 그 이후 양국간의 원한으로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돕지 못하게 되어 백제가 먼저 망하고 고구려도 따라서 망하게 되었다. 망한 백제는 왜열도로 갔고 망한 고구려는 발해로 이어졌다. 신라는 예족과 한족계가 많이 있어 당나라와 쉽게 연합할 수 있었으나 고구려와 백제와 왜는 부여계로서 한족과 연합하기 어려웠다. 고구려가 당에게 망하고 발해가 거란에게 망함으로서 우리 민족사에서 만주를 잃고 말았다. 그나마 고려와 조선이 여진족을 밀어내고 압록강 두만강까지는 회복하였으나 일제에게 먹힌 후에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현재의 일본인들은 고조선, 북부여, 동부여, 고구려, 신라, 가야, 마한, 백제의 백성들의 짬뽕이 대부분이며 원주민인 동남아계 조몬인과 아이누족의 피와 중국대륙의 한족 유민들의 피가 일부 섞여 있다. 처음에는 가야인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이어서 백제인이 많이 들어가서 가야계를 동북쪽 관동지역으로 밀어내고 규슈와 오사카지역을 차지하며 야마토 왜를 경영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백제계의 후손이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야계의 후손이다.

지금으로부터 2120년 전, 한무제에게 위만조선이 망하자 만주, 한반도의 정치환경이 급변하였고 만주의 일부 고조선 예족 백성들이 한반도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자 위협을 느낀 영산강 유역의 마한의 백성과 남해안의 고령,창령,김해가야의 백성들이 살아 남기 위하여 상대적으로 안전한 일본열도로 대거 피난 길에 올라 1차로 왜 열도로 대거 유입되어 각각의 고을에 선주 토착 이주민이 되었다. 혼슈나 규슈에 고구려계 마을도 여럿 있었다. 이 때에 철기를 가지고 갔고 가야계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가야계가 왜왕을 하였으며 한반도 가야국과 친밀하였다.(1기 천왕시대 14대까지) 가야계 마을, 백제계 마을, 고구려계 마을, 신라계 마을 등이 각각 산재하였다.

비류백제계는 해안을 좋아하는 해양지향적으로 충남지역에서 건국 초기부터 계속 규슈로 이주를 많이 하였다가 가야계를 오사카 지역으로 밀어 올리고 비류백제계 담로(구다라 다무로)를 규슈에 만들어 다스렸다. 오사카 지역으로 밀려 난 가야계 왜왕은 당시 웅진에서 광개토왕에게 패퇴하여 오사카 지역으로 들어 온 웅진백제후 세력에게 밀려 관동으로 피난하고 오사카 지역도 웅진 비류 백제계 다무로(야마토 왜)가 들어 선다.

광개토왕의 아들 고진 시기에 30년간 고구려계가 야마토 왜의 정권을 잡다가 한성백제계의 개로 왕자가 다시 백제계 정권을 회복시킨다. 오사카지역에서 힘이 커진 백제계는 동경 북쪽지역까지 쳐 들어 가서 또 하나의 백제계 다무로를 그 지역에 세우고 동경북쪽지역의 가야계는 더 북쪽으로 이주한다.

4세기 중반, 백제 전성기 근초고왕은 비류백제계 규슈 담로국의 협조를 받아 전남 해안의 마한소국과 가야 7국을 복속시키고 왜에 적극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되며 많은 한성 백제인들이 건너 가서 선진 문물을 왜열도에 전해 주면서 이때부터 백제와 야마토 왜는 한 집안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한반도 최초의 정복왕은 이와같이 백제 근초고왕이었고 가야, 전남 마한을 복속시키고 왜에 적극적으로 영양력을 미치기 시작하였고 북으로는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근구수왕자는 왜에서 천왕을 하다가 귀국하여 백제왕을 하였으며 또 다시 왜로 가서 호무다 왜왕(천왕)이 되었고 죽어서 480 미터의 거대 전방후원분에 묻혔다.

391년 광개토왕의 백제침공 때에 방어에 실패한 진사대왕에 대하여 왜천왕(근구수왕)은 왜군을 보내 진사대왕을 잡아들이고 막내아들인 아신왕을 즉위시켰다. 아신왕은 마한 침미다레와 가야를 치기도 하지만 고구려 광개토왕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396년 광개토왕이 아신왕의 백제를 대대적으로 다시 공격한다. 백제는 쑥밭이 되고 아신왕은 고구려를 섬기기로 하며 항복하니 광개토왕은 돌아간다.

400년 백제와 왜국은 반격을 하여 신라를 먼저 친다. 이에 광개토왕은 보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고 임나가라 삼한인 대마도까지 친다.
구주까지 복속시키고 임나십국을 다스린다. 아들 고진을 구주에 보내 다스리게 하고 나중에 고진이 오사카 대화로 쳐들어가 백제계 인덕천왕을 죽이고 제 19대윤공천왕이 되어 오사카 대화 왜를 20년간 다스린다.

백제계 왜찬왕은 동경지방으로 도망가서 왜열도 북쪽만을 다스린다. 왜의 남북 2국시대가 된다.

왜를 다스리던 근구수왕자 왜왕은 백제로 나와 백제를 다스리고 대신 그의 아들 침류왕자를 왜왕 기가 되어 하여 왜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후 근구수왕이 다시 왜로 가고 침류대왕이 백제대왕으로 서로 자리를 바꾸었다. 근구수왕은 왜에서 394년 죽었고 그의 고분은 415m에 달하는 거대 전반후원고분이다. 침류대왕은 백제왕을 하다가 산동반도 동진으로 가서 반란을 제압하는 유유장군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다가 중국 송나라 고조 유유가 되었다. 중국의 송나라와 백제와 왜는 이와같이 친척관계로 긴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다.

왜에 있던 침류대왕은 396년 광개토왕의 백제 침공에 대하여 싸우기 위하여 백제로 나오면서 왜는 인덕천왕에게 양위한다. 인덕천왕, 이중천왕은 광개토 아들 고구려계 고진에게 규슈를 뺏기고 고진의 오사카 침입으로 죽게된다. 당시 중국에 있던 침류대왕의 아들이 왜로 들어 와 왜 찬왕(반정천왕)이 되어 백제계를 추스리고 동경지방으로 피신하며 왜열도 북쪽만을 다스린다.

404년 백제 아신왕은 광개토왕에게 또 다시 패퇴하고 왜로 건너가고 왜에 있던 전지왕자가 백제로 귀국하여 전지왕이된다. 전지왕은 한 번 쫏겨났다가 다시 복위하여 두 번 백제대왕을 하다가 다시 왜로 가서 출가하여 승려로 있다가 고구려계 고진(윤공천왕)에게 죽는다. 백제에서 전지왕의 아들 비유왕이 즉위한다. 비유왕때 왜열도전체를 백제계가 다시 되찾는다. 비유왕의 아들이 개로왕자로 왜에서 맹활략하여 고구려계 천왕을 몰아내고 다시 백제계 단일 천왕을 오사카에 세웠다.

406년 고구려 구주분국을 안정화시키기 위하여 광개토 아들 고진을 구주에 보낸다. 고진은 구주를 평정하고 윤공천왕(왜진왕)이 되어 431년 오사카 대화에 입성하고 백제계인 인덕천왕, 이중천왕을 죽인다. 출가해 있던 백제 전지대왕도 죽인다. 이중천왕의 능과 전지총이 현재 일본에 있다.

432년 고구려계 고진에게 쫏긴 백제세력의 왜찬왕은 북쪽해안으로 도망가서 동경북쪽을 다스린다. 일본은 고구려계, 백제계의 남북 2국시대가 된다.

이와같이 근고초왕이래 백제 전성기는 30년을 넘지 못하고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유린되기 시작한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한반도 정복왕을 이어받아 백제, 가야를 쑥밭으로 만들고 돌아가고 왜에도 침입하여 아들 고진이 19대 윤공천왕이 되어 20년 동안 오사카 왜를 다스리게 되고 백제계 왜왕 찬은 동경지역으로 밀려가서 그곳만을 다스린다.

전지왕의 손자이자 비유왕의 아들인 백제 개로왕자가 20대 천왕 왜왕 제가 되어 오사카 고구려계를 몰아내고 오사카 지역을 백제계가 수복하였다. 동생 곤지왕에게 왜왕(왜왕 흥)을 물려준다. 곤지왕은 무령왕자에게 왜왕(왜왕 무)을 물려주고 공주로 나온다. 왜왕 무는 사촌 형제 게이타이 천왕에게 물려주고 백제로 나와 동성왕에 이어 무령대왕이 된다.

백제의 전성기인 369년 백제 근초고왕은 배를 타고 온 왜 비류계 다무로(담로) 병력과 협력하여 가라 7국과 전남 해안 강진, 해남지역 마한 소국까지 복속시킨다. 백제의 근초고왕은 372년 칠지도를 왜 비류 백제계 담로국에 보내 협력한 그 공을 치하하였고 신공황후의 침류왕자 출산을 기념하였다. 한반도 남해안에 임나가야를 경영하였다는 일본서기에 신공황후의 기록은 이 때의 협력 군사 사건을 과장하여 기록한 것이다. 신공황후가 근초고왕의 아들인 근수구왕자의 일본 부인이었다.

4세기 말에 강대해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배를 타고 현재 충남 지역의 웅진 비류 백제후(이잔)를 토멸하자 웅진의 비류백제의 마지막 백제후와 난민들이 왜 열도로 대거 이민을 가서 이미 꽉찬 규슈를 지나 오사카 갯가를 개척하고 정착하며 주위의 가야계를 복속시키면서 야마토 왜 정권을 확장하였다. 이미 그 당시 규슈에는 이미 비류계 백제 다무로(담로)가 있었기 웅진세력은 오사카로 들어 가서 갯가를 간척하며 정착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규슈의 백제 구나라 담로국(다무로)과 연합하여 오사카 가야계 왜왕을 제압하고 야마토 왜를 열며 15대 웅진 진씨 성의 웅신천왕이 되고 4대를 지속하다가(2기 천왕시대) 왜열도까지 따라 들어 온 광개토대왕의 아들 고진에게 20년 동안 오사카 대화 정권(19대 천왕)을 빼앗끼고 백제계 왜왕 찬이 동경지역으로 피신하여 그곳을 다스리다가 왜열도로 온 한성 백제 개로왕자가 백제계와 가야를 연합하여 오사카 지역의 고구려계정권을 무너트리고 오사카를 수복하면서 다시 백제계 여씨 성의 왜왕 제를 하였고 동생 곤지에게 물려 주었으며 그 후손들이 계속 이어져 오늘 날의 천왕이므로 천왕은 여씨 성의 한성 백제계의 후손이다. 고구려계에게 빼앗긴 오사카 왜를 수복한 것은 왜왕 제(개로왕자)이고 확장시킨 것은 그의 동생 곤지(천령천왕=왜왕 고이)로서 오늘날 일본천왕은 그의 후손이다.

5세기 때, 고구려 장수왕에게 완전히 망한 개로대왕의 한성백제계는 작은 집 격인 곤지왕(유라쿠 천왕)의 오사카 나라 지역으로 대거 피난하는 혼슈로의 3차 대거 유입이 있었다. 곤지가 바로 유라쿠 천왕(천령천왕, 왜왕 흥)이고 그의 아들(개로왕의 아들, 양자들임)이 공주에 뭍힌 백제의 무령왕으로 곤지에 이어 왜왕 무를 하다가 청진에 상륙하여 고구려와 20년을 싸웠으며 40세에 백제 무령왕이 되어 또 다시 백제왕으로 22년을 재위하였다. 무령대왕는 아버지가 둘 이다. 개로대왕은 실제 아버지며 곤지왕은 실제로는 숙부이나 양아버지이다. 곤지왕과 무령대왕은 한 시대의 영웅으로 한반도, 왜열도를 넘나들면서 한 시대의 역사를 만들었다.

그 이후 일본천왕은 왜에 남아 있던 무령왕의 사촌형제인 게이타이 천왕(곤지의 아들)이 이어받아 오늘날에 이르렀으므로 당연히 천왕의 피속에는 백제왕족의 백제 여씨의 피가 흐르고 있다 고 현재 천왕이 고백한 것이다.

왜왕 무(시마) 이전 4대에는 백제왕이 왜왕을 겸임하거나 왜의 담로국에 왕자를 보내 총독격인 왜왕을 시켜서 간접 통치하거나 하였다. 왕자시절에 왜열도로 간 개로 왕자는 백제계와 가야를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빼앗긴 오사카 지역의 광개토 아들 고구려계 정권을 제압하고 백제계 정권(왜왕 제를 함)을 회복시킨 후 동생 곤지에게 왜 야마토 정권을 물려주어 곤지가 유라쿠천왕(왜왕 흥)이 된다(4기 천왕시대). 이와같이 백제왕과 왜왕은 부자지간이거나 형제지간이었거나 백제왕이 겸임하거나 하였다.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성백제가 망한 후부터는
야마토 왜가 부여계의 큰 집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망한 남부여 20만여명의 백제유민들이 또 다시 일본열도로 피난하는 4차 대거 유입이 있었고 압도적으로 수가 많은 백제계가 일본열도의 정권을 계속 잡았고 오늘날 천왕의 피속에 백제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고 현재 일본 천왕이 고백한 바 있다.

663년 백강전투에서 나당 수군의 바람을 이용한 화공으로 4번 연달아 패배한 왜(열도부여)와 백제부흥군은 왜로 패주하면서 반도부여(백제)의 부흥을 포기하였고 나당연합군의 왜열도까지 침략을 두려워하여 일본열도 고립주의로 들어가서 한반도와 인연을 끊고 왜왕이라는 용어를 버리며 8세기부터 천왕주의인 고립주의 독립 일본(천왕제)이 성립하고 이전 백제사를 모방하면서 선대 300년의 역사를 일본서기에 꾸미게 되고 한반도와 인연을 끊고 적대시하기 시작하였다.

한반도를 적대시하면서 고립 왜열도에서 300년간 세력을 키운 왜의 왜구는 고려조에도 한반도 침입을 매우 극심하게 하였다. 려말 이성계는 육지에 상륙한 왜구를 제압하면서 성장한 무장이었다.
고려를 일으킨 왕건이 후백제를 제압하는 최후의 전투에서 발해에서 원조한 기마 말갈병이 동원되었다. 고려는 발해의 도움으로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발해가 거란에 망하자 많은 고구려계 발해인들이 고려로 피신 망명하였기에 고구려를 더욱 계승하게 된다.

고려조 초기에는 발해(고구려족+여진족)를 멸망시킨 거란(요나라)의 침입이 있었으나 서희 장군 등이 잘 방어하고 오히려 청천강을 넘어 압록강까지 영토를 넓혔다. 고려 중기에는 윤관 등이 9성을 쌓고 백두산과 함경도의 여진족(말갈족)을 밀어 냈으나 다시 땅을 돌려주고 눌러 앉은 패착을 두었다가 몽고의 침입으로 100년 동안 원나라의 부마국인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이어 조선도 명나라를 사대하고 스스로 속국이 되었으며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다가 일본에게 완전히 먹혔다. 미국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독립을 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우리역사와 관련있는 주위 민족들을 보면, 한족, 흉노족, 여진족, 거란족, 몽고족, 일본족 등이다.
여진족(말갈족)과 일본족이 그 중에서 우리민족과 가장 가까운 혈연이라 할 수 있다. 여진족은 청나라를 세워서 중국대륙을 지배하였으나 한족에 동화되어 사라져버렸다. 요나라의 거란족도 한족에 동화되어 사라져 버렷다. 현재 북방 기마민족후예로서 남은 민족은 우리민족과 일본족, 몽고족, 중앙아시아족만 남았다.

전국시대 왜 열도를 통일한 히데요시는 전국적인 세력을 모아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앞세워 조선을 전면적으로 침입하였다. 오사카성을 축성한 히데요시는 오사카 중심의 백제계 후손이다.

일본이 한반도를 앞서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직전부터로서 그들이 한반도가 아닌 바다를 통하여 포르투칼, 네덜란드로부터 조총 등의 서구 문명을 직접 받아 들인 것이 그 이유였고 힘이 커진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켜 반도를 전면적으로 침입한다. 그러나 명나라의 참전과 이순신의 수군의 역할로 실패하고 왜열도로 철수한다.

임진왜란 후 300년 동안 서구 문명을 더욱더 적극 받아들여 철선과 대포를 만들며 청나라과 러시아를 제압하면서 아시아의 패권국으로서 조선을 먹었다. 조선을 토해낸 것은 일제가 미국에게 패하자, 미국이 일본을 약화시키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독립시켜 주었을 뿐이다. 실력이 아닌 대단한 행운으로 나라를 되찾은 것이다. 일본이 떠난 남한은 미국이 들어왔고 북한은 소련이 들어왔다.

히틀러를 잡기 위하여 미국은 독소전쟁 초중기에 수세였던 스탈린에게 무기와 차량을 공급하며 스탈린에게 독소전의 승리를 안겨주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때는 미국과 소련은 이와같이 연합군의 일원이었다. 또한 미국은 일본을 제압하기 위하여 스탈린이 만주 일본 관동군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원자탄에 일본이 너무 일찍 무조건 항복하자 스탈린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지게 되었고 이를 눈치챈 스탈린은 와해된 관동군의 만주와 북한으로 무조건 진주하여 한반도의 남북분단은 시작되었다. 북한지역에 남아 있던 수 많은 일본군의 무기는 모텍동의 중국 공산당군에게 지원되어 장개석의 국민당군을 밀어 내는데 사용되었다.

스탈린은 양쯔강을 경계로 중국도 남북으로 분단되는 것을 원하였고 모텍동이 양쯔강을 넘어 남으로 진격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이를 무시하고 모텍동은 양쯔강을 넘어 장개석을 계속 밀어 붙여 중국대륙의 통일을 이루었다. 그나마 미국의 도움으로 장개석은 대만으로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모텍동의 공산 중국 통일은 스탈린이나 미국이 원하는 그림이 아니었고 중국 남북 분열이 목표였다. 통일중국은 항상 주변국과 세계에게 위협적이기 때문이었다. 차도살인이란 말이 있듯이 스탈린은 6.25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중국을 서로 싸움 붙여서 중국의 힘을 빼려고 하였으나 그가 죽자 둘은 휴전에 합의하고 말았다. 스탈린의 우려대로 지구 반쪽에 대한 소련의 지배는 끝나갔고 통일 중국이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강대해진 통일 중국견제를 위하여 미국은 일본, 인도와 동남아 국가들과 연합하고 있다. 통일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이와같이 주변국이나 세계에 두려운 존재였다. 고조선도 통일 중국 한나라에게 침입을 당하여 망하였고 고구려, 백제도 통일 당나라에게 망하였다. 통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에게 고려, 조선은 속국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그나마 일본과 베트남 정도가 중국과 대립하면서도 먹히지 않고 독립을 유지하였다.

중국문헌에도 남아 있듯이 춘추전국시대, 진시황제, 한무제시대까지 2300년간 분명히 실존한 조선(고조선)이 식민사관으로는 신화로 둔갑한다. 학자가 썩으면 이와 같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에 한족 즈그들끼리 서로 싸울 때는 만리장성 동북쪽 만주의 고조선은 제국으로 건재하였다.

그러나 한족을 통일한 한 나라 유방에게 쫏겨 도망 온 연나라 장수 위만이 쿠테타를 일으켜 준왕의 고조선을 몰아내고 위만 조선이 되었다가 100년 후 한무제 시대에 한나라에게 위만조선도 망하고 그곳 요서지역에 한사군이 세워진 것은 맞다. 한나라 시대의 이 두 시기에 많은 고조선 유민들(예족)이 선진 기술을 가지고 동만주와 한반도 동남쪽과 왜열도로 피난하여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북만주는 한무제에게 망하지 않고 고조선을 이어 해모수의 북부여가 바로 일어서 한나라를 만리장성 이남으로 물리쳤고 북만주를 북부여가 5대 동안 지배하다가 졸본부여가 떨어져 나가고 그 이후 부여는 요동과 간도롤 피난을 가서 4세기까지 지속하다가 백제 근초고왕시대에 만주를 버리고 백제로 합류하였다. 독립한 졸본부여는 고주몽의 고구려가 계승하였다. 고구려의 원시조는 해모수이고 고주몽은 고구려의 중시조 쯤 된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12대 왕이지만 광개토왕비에는 17대 손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북부여의 해모수로부터 17대 손이라는 것으로 고구려는 단군조선, 북부여를 계승하였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고 있다. 백제도 고두막한의 졸본부여를 계승하였다고 하여 남부여로 불렸다. 일본의 왜는 열도 부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고구려, 백제, 왜는 모두 단군조선-북부여에 자신들의 정통성을 두고 있다.

만약 고조선이 신화이면 중국 전국시대 연나라, 통일 한 나라도 역사가 아닌 신화라는 말인가? 고조선이 전국시대 연나라와 계속 밀고 당기며 계속 싸웠으며 나중에는 통일 한 나라에게 침입을 당하여 위만조선은 망하였으나 북만주의 대조선은 북부여로 바뀌어서 망하지 않고 계승되었다. 존재하지 않은 나라가 어떻게 중국 연나라, 한나라와 수 천 년 동안 싸우나?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였다 고 천명하면서 국호를 고려라 하였는데 고려를 뒤 엎은 이성계의 조선은 고구려보다 더 앞서서 존재하였던 고조선을 계승하였다고 하면서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고 이성계의 조선이 고려보다도 더 정당하고 정통성이 있는 국가임을 내세우고 싶어 했다. 이성계의 조선은 특히 기원전 1200년부터 1000년간의 기자조선을 문명국가로서 흠모하였다.

최영의 패착은 요동정벌의 대장군으로서 군대를 이끌고 선봉에 서지 않고 후방인 개성에 머물면서 지휘만 하려고 하였던 데 있었다. 권력을 누리기만 하였던 것이다. 전방의 실질적인 군대를 이성계에게 맡긴 것이 화근이 되었고 결정적인 패착이 되어 최영 자신과 고려는 망하게 되었다. 반역은 항상 예상하지 않은 사람이 일으킨다. 궁예에게 왕건이 그러하였고 최영에게 이성계가 그러하였다. 장면에게 박정희가 그러했고 박정희에게 김재규가 그러하였다. 고조선 준왕에게 위만이 그러하였다.

10.26은 비정상의 결과이다. 황음에 빠진 권력, 무당 최태민 일당의 칼춤, 어린 생도신분의 방탕, 이와같이 모두가 최악의 비정상의 약점 투성이 결과는 믿는 부하에 의한 총격으로 결말이 났을 뿐이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오늘 날 또 다시 국가권력의 사유화란 비정상의 끝은 또 다시 비극이다. 구멍가게도 운영하는데 무신불립이라는 원칙이 있는 법이다. 견제없는 절대권력은 절대로 부패하기 마련이며 권력은 누리는 게 아니고 봉사인데 이것을 거역하는 자는 반드시 불행으로 결말이 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군주민수로서 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어 가라앉게도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남은 환상을 깨트린 것은 무신불립의 문란한 국정운영의 부메랑이었다.

일제에게 배운 썩은 식민사관 학자들이 나라와 민족혼을 망치고
그들의 일본 스승들에게만 충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학자가 썩으면 나라가 썩는다. 일본 역사 2500년은 만주와 한반도로부터 이주 피난민이 시작한 것에 불과하나 엄청난 개조의 노력으로 지금은 세계 강대국중 하나가 되었다. 여하튼 일본은 유전적으로는 우리의 사촌임에 분명하다.

고조선, 북부여, 고구려의 정통성은 발해를 거쳐 고려로 갔다가 조선으로 이어졌다. 신라, 백제의 정통성은 고려를 거쳐 조선으로 이어졌다. 고조선, 북부여, 백제, 마한, 가야의 정통성의 일부는 일본열도로 갔다. 일본인 선조의 고향인 한반도로 돌아 가고 싶은 일본인 유전자가 정한론의 실체이다. 일본서기에는 언제 웅진의 조상의 묘에 다시 참배하려 갈거나 라고 적혀 있다. 지금도 공주의 무령왕릉에 일본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오고 있으며 일본 왕세자도 참배한 바 있다. 왜 열도로 간 사람들은 공주를 중심으로 기호지방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기러기로 상징되는 고조선/북부여의 만주벌판에 대한 그리움이 고려말의 요동정벌의 실체이며 만주는 우리 선조의 땅이라는 것이 한국인의 유전자속에는 깊이 박혀 있다. 만주가 고구려의 땅이었으므로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천명한 고려의 만주의 요동정벌은 자기의 땅을 찾는 것이므로 매우 당연한 것이었으나 이성계의 회군으로 만주에 대한 권리를 또 다시 스스로 포기하였고 만주를 결정적으로 잃게 되었다. 일제를 피해 간도로 이주한 조선족들이 또 다시 만주 길림성을 개척하며 연길의 조선족이 만들어졌으나 중국의 소수민족중 하나가 되었을 뿐이다.

남북통일이 되면 통일한국은 연길을 포함한 간도도 우리 것이었으니 중국에게 달라고 요구할 것으로 보아 중국은 한반도의 통일을 원치 않는다. 한반도는 중국 뒷 머리에 붙은 망치와도 같아 통일한국은 중국의 뒷 머리를 위협할 수 있다고 본다. 중국입장에서 북한은 북경과 만주를 지키는 울타리이기 때문에 북한의 붕괴를 원하지 않는다. 울타리가 무너질려고 하면 중국은 반드시 한반도에 군대를 보냈는데 6.25때 중공군의 참전이 그러하고 멀리는 임진왜란시 명나라의 참전이 그러하며 663년 왜와의 백강전투가 그러하다. 중국도 울타리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하다.

일본도 강대한 한반도 통일국가의 출현을 원치 않는다. 통일 한반도는 일본의 심장을 겨루는 단도와 같다고 일본은 본다. 일본도 분단된 남한을 울타리로 보며 대륙세력에 대한 완충지대로 보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통일이 우리의 뜻대로만 되지 않는 배경이다. 임진왜란 시대에도 일본은 한반도 남쪽 4개 도를 할양해달라고 명나라에게 요구하였다. 8.15 무조건 항복하면서까지 북쪽 땅은 자발적 무장해제하고 소련군에 대하여 남쪽 땅만을 일본군이 방어하면서 미군에 넘겨주어 남쪽을 대륙세력에게 넘기지 않으려고 일제는 끝까지 시도하였다. 그만큼 한반도 남쪽만이라도 일본의 울타리로 삼으려 하였기에 일본은 절대 남북통일을 원치 않는다.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단독의 패권국이 되면 동아시아 패권국으로 머물지 않고 세계의 패권국이 되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동아시아에서조차도 중국이 단독 패권국이 되지 못하도록 일본, 인도 등으로 막는 것이 현재의 세계 패권국 미국의 정책으로 중국포위전략이다. 일본-한국-대만-필리핀-인도네시아-인도차이나-인도-중앙아시아국가들-몽고 등으로 중국을 에워싸서 동아시아에 묶어두고 세계패권국으로 나오는 것을 방해한다.

중국은 대륙 강국은 되었으나 해양대국은 아니기에 갑갑하다. 세계 패권국이 되려면 해양대국이어야 한다. 태평양을 나누어 먹자고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미국에 도전하였지만 결과는 일제의 패망이었다. 미국이 태평양을 나누어 가질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전혀 없다. 중국이 나누어 먹자고 덤비면 또 한 번의 크나 큰 태평양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결과는 뻔하기 때문에 중국은 말로는 큰 소리를 치지만 도발은 하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중국에게는 패하지 않았다고 자부하는 일본이 또한 중국의 앞 마당에 버티고 있다. 미국이 없다면 중국이 한국을 굴복시킬 수 있으나 일본을 굴복시킬 수 없다.
미국이 있으면 한국도 더 큰 대형을 믿고 차형인 중국에 굴복하지 않는다. 다만 먹고 사는 장사는 중국과 더 많이 할 것이다. 중국은 이 장사를 가지고 한국을 콘트롤하려고 할 것이다.

현재의 태평양에서 일본으로 하여금 중국팽창을 막도록 역할을 맡겼으며 인도양에서 인도를 키워 중국팽창을 견제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지역 권력도 중국이 혼자 먹지 말고 일본과 인도와 나누어 가지라는 것이고 세계 패권 권력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한국과 대만은 중국 코 앞에 침몰하지 않는 해양패권국 미국의 거대 항공모함 역할을 해 주면서 안전을 보장받고 세계를 대상으로 장사를 하고 있을 뿐이다.

북한마저 중국포위에 가담한다면 중국은 완전히 포위되기 때문에 북한을 애지중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은 어떠한 경우에도 북한이라는 변견과 울타리를 버리지 못한다. 북한이 망하고 싶어도 중국이 북한을 망하게 가만 놔두지 않는다. 이런 구도하에서 혹시 북정권은 바뀔 수도 있을 지도 모르나 북한은 무너지지 않는다. 김정은이 혹시 유고 상태에 있더라도 미국과 남한은 중국의 허락없이 휴전선을 넘을 수 있을까? 이런 국제관계를 안다면 통일은 대박이라는 허구맹랑한 얘기를 지도자가 할 수 있을까? 그런 말은 무지의 소치이거나 혹세무민의 거짓말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독일통일도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 주변 강대국이 모두 반대하였으나 독일은 그들 자신의 지혜와 돈의 힘으로 패권국 미국과 소련을 설득하여 통일을 달성하고 마침내 서유럽 최강대국이 되었다는 것을 교훈삼아야 한다. 그러나 독일과 한국은 분단이 만들어진 상황이 매우 다르고 6.25 동족상잔을 겪으면서 남,북이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기 때문에 독일처럼 통일이 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고 중국과 미국의 합의가 통일에 절대조건이나 현실적으로 불가하다.

또한 남과 북은 적대적 공생관계이기 때문에 속내로는 서로 통일을 원하지도 않으면서 정치적인 이유로 표면적으로는 통일을 외칠 뿐이기 때문에 독일식의 통일이 매우 어렵다. 서독은 수 십 년 동안 동독을 안심시키는 데 투자하여 동독인들의 통일에 대한 거부감을 줄인 후에 미국과 소련의 허락하에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북한 뒤에는 중국이 버티고 있고 남한 뒤에는 미국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통일이 거의 불가한 상태로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이게 6.25 전쟁으로 증명된 것 아닌가? 더 이상 혹세무민의 정치인들은 통일대박 따위을 팔지 말기를 바란다.

임진왜란시 이순신의 수군은 판옥선이라는 주력선의 크기와 강도가 일본 배보다 한 수 위였다. 즉, 크고 강한 배에 함포를 실어서 함포사격을 하였고 왜선은 속도만 중시하는 작고 약한 배여서 함포를 실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왜군은 아군의 배에 접근하여 조총과 칼로 육박전이 특기인데 접근하기 전에 아군의 함포사격으로 적의 배는 침몰하였다. 함포사격과 조총사격의 싸움의 결과는 자명한 것 아닌가? 그 당시 배를 만드는 기술과 학식이 조선이 한 수 위였던 것이다. 학식과 기술은 이와 같이 전쟁의 승패를 가를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평양까지 올라 간 왜군은 해상보급이 불가능하여 보급이 어려웠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제해권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낀 일본은 그 후 300년 동안 철선과 함포의 해군을 키웠고 철선하나 없는 조선은 나라를 잃었다. 전쟁은 과학과 기술의 게임인 것이다. 학자가 썩으면 이렇게 나라도 잃게 된다.

정치인이 무당식의 혹세무민의 거짓으로 통일대박을 말할 때 학자들이라도 이러한 남과 북의 적대적 공생관계와 냉혹한 국제현실에 대하여 진실을 말해야 한다. 정치는 필요에 따라 적군도 속이지만 아군도 속이는 법이다. 정치가들은 염치를 모른다. 그러므로 모든 분야에서 학자들이라도 중심을 잡아주어야 나라가 산다. 제비 한 마리 왔다고 봄이 온 것은 아니듯이 국제구도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통일은 바로 오지 않는다.

인체 유해 살균제를 쥐 실험에서 무해하다 고 거짓 보고서를 낸 동물학자는 그런 점에서 학자도 아니며 그런 거짓 보고서에도 교수직을 유지시켜주니 타락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교수직에서 영원히 추방하여야 하고 감옥에 보내야 한다.

교수직을 돈과 권력과 집안배경으로 사고 파는 매관매직이 국립이라는 탈을 쓴 대학에 있어 왔으며 부정하고 실력도 없는 자들이 교수라는 탈을 쓰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왔다. 이런 부정한 학계와 학자들을 이 번 기회에 바로 잡지 않으면 한국은 미래가 없다. 실력도 없고 연구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뒷 배경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부정한 자가 날뛰는 세상은 더는 없어야 한다. 누리기만 하고 봉사하지 않는 권력자들이 공동체를 무너트리고 만다. 구멍가게도 원칙이있는 법이다. 무신불립, 신뢰가 무너지면 일어설 수가 없고 반드시 무너진다.

신상필벌은 공산 독재 악마인 스탈린조차도 지킨 원칙이었다. 학계에서는 부정과 실력없음이 스탈린과 같은 살인마보다 더 악한 것이다. 학계가 정치의 시녀가 되는 현실은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다. 정치가 거짓을 말하더라도 학자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 무신불립이라 했거늘 리더가 거짓을 말하다 보면 반드시 망조에 들어선다.

이러한 인문학과 역사와 국제정치를 모르면 의사가 의생이 되고 물대포 맞고 두부 함몰골절 및 뇌내 출혈로 의식과 자발호흡을 회복하지 못하여 억지로 인공호흡기에 의지하다가 몇 개월 후에 사망한 농민을 외인사가 아니고 병사라고 잔꾀를 부리는 괴물 관직 의생이 나온다. 주치의사는 정당하지 않은 공권력과 환자가 대립할 때는 당연히 환자의 편에 서야 의사이다.

궁예는 미륵불을 자처하며 민중의 세력을 모아 나라를 일으켯으나 나라는 신령으로만 계속 통치할 수 없는 것이기에 현실주의 왕건에게 쫓겨났다. 신령이 아닌 내공과 실력으로 나라를 통치하여야 나라가 굴러가는 것이다. 실력 없음이 몇 년도 안 가서 뽀록이 나기 마련이며 그 점에서 궁예와 현 시국은 매우 닮았다. 무신불립이라 하였는데 민심을 거르며 거짓을 말하는 막무가내 버티기가 가면 얼마나 갈까? 국가 리더쉽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는데 몇 개월을 버틴다고 무너진 신뢰가 다시 세워질까? 군주민수, 즉 군은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성나면 배를 뒤집기도 한다.

국민이 일시적으로 맡겨 놓은 권력을 공정하게 공심으로만 사용되어야 하나 만약 사심으로 사용하거나 호가호위하는 사적 비선이 사적 이익에 동원한다면 천박한 권력이 되어 본인 자신과 공동체가 반드시 망하는 길로서 불행의 길로 들어 서는 불나비와 같은 인생이 된다. 인문학과 역사 의식을 가진다면 사심으로 권력을 이용할 수도 없으며 사이비 신기 들린 무당식의 비선실세가 호가호위하면서 나라를 뿌리부터 전횡하는 천박한 권력은 나오지 않는다. 공정성이 무너진 나라는 공동체통합이 깨지고 성난 민심의 바닷물은 파도가 되어 비도덕적인 권력이라는 배를 뒤집는다. 신뢰를 잃고 누리기만 하는 부당한 권력은 단명하며 파도가 치기도 하고 조용하기도 하는 바닷물은 출렁일뿐 영원하다.

조상들의 역사만 역사가 아니고 오늘날 한 개인의 일상사도 하루하루가 역사이다. 뜻 깊고 의의 있게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역사는 살아 있고 오늘도 계속 흐르고 있다. 역사가 너무 무서워서 왕조시대 조선왕들도 개차반으로 살 수 없었는데 오늘 날 대명천지에 사심의 부당한 권력행사가 왠말이며 호가호위하는 사이비 신기 들린 무당식의 비선실세와 내시 3인방이 나라를 근본부터 말아 먹게 만든 천박하고 무능한 권력이 왠말인가? 공심과 공정성이 무너지면 백성이라는 성난 물은 권력자라는 배를 뒤집어 버린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못나고 부당한 배를 뒤집기도 하는 법이다. 권력은 백성으로 부터 오는 것이며 백성에게 버림받은 부당하고 누리는 권력은 단명한다. 봉사하는 권력은 오래 가고 칭송받는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는 말이 있듯이 권력자가 천박하면 선무당과 사심의 간신들이 정치에 들어 오고 나라가 반드시 망하였던 역사가 있다. 고려말의 신돈, 조선말 민비의 진령군이라는 무당, 한나라의 십상시 그리고 오늘날의 영생교주 일가와 내시 3인방은 신령정치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내시 3인방은 신령정치의 하수인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권력의 단물을 같이 빼먹으며 공동체를 망가트리면서 그들을 비서로 뽑아 준 상전인 비선에게 충성을 다 하였고 비선은 권력자에게 충성과 아부를 다 하였으니 최종책임은 천박한 권력자이다. 구멍가게도 원칙이 있고 무신불립이다. 하물며 나라는? 국가 리더쉽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는데 백약이 무효다.

그런 비리 구조가 가능하도록 만든 최고 권력자는 천박하기에 경멸과 조롱을 받고 염치없음이 극에 달하였다. 이미 성난 민심의 물은 험한 파도가 되었고 정당성을 잃은 권력은 종이 배와 같이 허약한 존재가 되어 버렸는데 국민수준을 깔보는 막무가네식 버티기가 가면 얼마나 갈까? 군주민수이고 무신불립인데 말이다.

역사는 항상 살아 있으니 역사 무서운 지를 알아야 한다. 작금의 사태에 백성들은 말하고 있다. 정치, 학계 등 모든 분야의 리더는 구성원의 신뢰를 잃으면 곧 종말이요 무신불립이다. 그 자신의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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